중대재해법 논란 속 “노동자 안전에 총력” 메시지

[주간한국 주현웅 기자] ‘중대재해기업처벌법’(중대재해법) 입법 논의에 재계 반대 목소리가 높아졌던 이달 초.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신년사가 유독 눈에 띄었다. 정 회장은 신년사에서 노동자들의 안전한 작업 환경 조성을 거듭 강조했다. 올해 신년사를 밝힌 기업 총수들 중 노동자의 안전 문제를 주요하게 거론한 인물은 정 회장이 유일하다.

물론 그 직전 울산공장에서 협력업체 직원이 근로 도중 사망한 사건과 무관하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기업 총수가 자신이 속한 사업장 내 중대재해에 대해 선제적으로 사과하는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던 사례이기도 하다. 재계에서는 정 회장의 이번 메시지가 단순 구호에 그치지 않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관측하고 있다. 향후 미래로 나아갈 현대차의 변화와 방향성과도 맞물려있기 때문이다.

협력업체 직원 사망…

총수 취임 첫 신년회 연기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올해 초 국내 기업들의 주요한 화두 중 하나는 ‘노동’이었다. 지난달 노동조합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데 이어 중대재해법 제정을 코앞에 둔 시기였기 때문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의 경우 지난 12월 31일 신년사에서 “앞으로 정부는 세계 최고 수준의 노동시장 경직성을 해소해야 할 것”이라며 “우리는 노동시장의 개혁을 서둘러 추진해야 할 때라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노동 시장에 ‘매스’를 가해야 할 필요성을 새해 첫 메시지로 피력한 것이다.

하지만 정 회장의 지난 4일 신년사는 노동 문제에 관해 경총과는 다른 지점을 강조했다. 정 회장은 신년사를 통해 “울산공장에서 협력업체 직원 분이 작업 중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운을 뗐다. 이어 “진심으로 깊은 애도를 표하며 회사는 이러한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안전한 환경 조성과 안전사고 예방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약속했다. 새해 당부사항으로 노동자의 ‘안전성 담보’를 내세운 것이다.

앞서 현대차 울산공장에서는 지난 3일 협력업체 소속 노동자 김모씨가 근무 중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공장에서 청소 업무를 하던 중 차량 제조 장비에 가슴이 눌려 참변을 당한 것이다.

이 사고로 현대차는 당초 예정됐던 온라인 신년회를 취소했다. 정 회장의 총수 취임 후 첫 신년회라는 점에서 안팎의 관심이 컸던 행사였다. 하지만 ‘협력직원 사고에 대한 애도가 우선’이라는 정 회장의 뜻이 반영돼 행사가 취소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신 정 회장은 이메일을 통한 신년사에서 “안전한 근무환경 조성을 위해 다 함께 노력하자”고 임직원들에 주문했던 것이다.

‘실질적’ 개선 불가피한 환경

현대차 울산공장.
비록 이메일로 전달된 신년사이지만 회사가 감당해야 할 무게는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국내 기업에도 운명처럼 몰아친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 까닭에서다. 현대차는 이들 중 ‘사회적 책임’의 한 축인 작업장 내 노동환경의 실태 완화를 중요한 과제로 안고 있다. 노동자가 사망에 이르는 등의 중대재해는 지난해까지 3년 연속 무사고를 달성했다. 다만 직원이 심각한 부상을 입는 등의 산업재해는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산업재해의 잠재적 리스크가 점점 커지는 추세를 보인 것이다.

지난해에 발간된 현대차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 따르면 현대차의 국내사업장(울산, 아산, 전주)에서 발생한 산업재해자 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연도 별로 보면 ▲2017년 210명 ▲2018년 286명 ▲2019년 377명을 각각 기록했다. 산업재해율도 마찬가지다. 이 역시 ▲2017년 0.53% ▲2018년 0.71% ▲2019년 0.93%로 매해 증가추세를 그리고 있다.

추이와 별도로 수치 자체만을 보면 언뜻 적다고 여겨질 수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 2015~2019년 국내 전 산업의 산업재해율은 0.58%다. 2019년 현대차의 산업재해율 0.93%라는 수치는 그보다 약 1.6배 높은 수준이다.

특기할 대목은 현대차의 해외사업장은 추세가 정반대라는 점이다. 2019년 현대차 해외생산법인의 산업재해자수는 18명이었다. 2017년 41명, 2018년 32명이었던 점과 비교하면 크게 줄어들었다. 산업재해율도 2017년 0.11%, 2018년 0.09%, 2019년 0.08%로 감소세를 보였다. 이 또한 국내 사업장보다 훨씬 낮은 수준을 기록한 것이다.

물론 이 같은 현황이 당장 현대차의 기업 가치를 하락시킬 요소는 아니다. 매년 국내 상장 기업들의 ESG 가치를 평가·발표해온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국민연금 의결권 자문사)에 따르면 현대차는 지난해 ESG ‘A’ 등급을 받았다. 항목별로는 환경(E)에서 A, 사회(S)에서 A+, 지배구조(G)에서 A 등급으로 평가됐다. 사업장 내 산업재해가 계속 늘고 있음에도 사회 부문에서 A+등급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현대차가 중대재해 및 산업재해 부문에서 적절히 대응할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KCGS ESG평가팀 관계자는 “사회적 책임 부문 평가에서 고려하는 요소가 산업재해뿐만은 아니다”면서 “다만 어느 기업이든 중대·산업재해의 발생빈도 및 중한 정도에 따라 추후에 등급조정이 있을 수 있다”고 전했다.

현대차 관계자는 “2018년부터 사업주 날인을 받지 않고 산업재해 신청이 가능하도록 법이 개정되는 등의 영향이 반영된 듯하다”며 “산업재해 신청 건수가 늘면서 인정된 건수도 증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해외 사업장이 반대로 감소세를 그린 것은 각국의 법규 등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고 부연했다.

한편 현대차는 오는 2월 약 3000억 원 규모의 그린본드 발행을 검토 중이다. 글로벌 필(必)환경 시대의 시장 선점을 위한 과감한 투자의 일환으로 보인다. 현대차는 친환경 미래 모빌리티에 적용할 수 있는 차세대 수소연료전지 시스템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오는 2030년 70만 기의 수소연료전지를 시장에 판매한다는 목표도 내세웠다.



주현웅 기자 chesco12@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