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랑의 비메모리 반도체 패권경쟁…고민 깊어지는 삼성전자

[주간한국 주현웅 기자] 글로벌 반도체 업계가 요동치고 있다.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인 인텔이 반도체 파운드리(비메모리 반도체 위탁생산) 시장 사업에 다시 뛰어들겠다고 선언했다. 대만 TSMC와 세계 선두 경쟁을 벌이고 있는 삼성전자로서는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역습이 마냥 달갑지 않는 모양새다. 결국 삼성전자도 미국의 반도체 역습 대상에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을 초래한 것은 차량용 반도체의 공급난 사태가 발단이 됐다. 특히 최근 일본 반도체 기업 ‘르네사스일렉트로닉스’ 공장의 대형 화재 발생은 반도체공급난의 위기감을 부채질하기에 이른다. 이 회사는 세계 2위 차량용반도체 제조사다. 현대차 등 국내 기업의 주요 거래회사는 아니지만 이번 사고는 차량용반도체 품귀 현상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 우려되고 있다. 아울러 중국이 미얀마의 희토류를 수입하는 데 차질을 빚고 있다는 소식까지 전해졌다. 희토류는 반도체 등 첨단 산업에서 핵심 소재로 사용되는 물질이다.
이처럼 차량용 반도체 수급 불균형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인텔 참전에 따른 비메모리 반도체산업의 패권 경쟁과 이에 따른 혼란은 피할 수 없게 됐다.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그야말로 격랑에 빠져든 모양새다.
돌아온 인텔 “삼성, TSMC 나와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의 인텔 본사.
인텔은 지난 23일(현지시간) 200억 달러(약 22조6000억 원)를 투자해 미국 애리조나주에 반도체 공장 2곳을 신설, 이를 토대로 파운드리 사업을 키워나가겠다고 발표했다. 팻 겔싱어 인텔 CEO는 이날 온라인 브리핑에서 “오는 2025년까지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은 1000억 달러로 성장할 것”이라며 “현재 아시아에 집중된 반도체 제조기반을 미국과 유럽에서도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삼성전자와 TSMC를 향한 선전포고와 다름없다. 비메모리 반도체는 인공지능(AI), 자율주행차, 빅데이터 등에 활용되는 핵심 기술이다. 미래기술의 쌀로 비유되곤 한다. 아시아에 속한 한국의 삼성전자와 대만의 TSMC가 세계 1위를 두고 각축전을 벌이는 가운데, 인텔의 이번 선언은 차세대 산업 패권 경쟁에서 미국이 주도권을 다시 가져가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실제로 인텔은 앞으로 미국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공격적 행보에 나설 것으로 분석된다. 앞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최우선 사안 중 하나로 반도체 품귀 현상 해결을 지목한 바 있다. 이와 맞물려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 강화 방침을 내세운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이 삼성전자 등에 위협으로 작용하는 이유가 인텔의 자본력 때문만은 아니다. 인텔은 파운드리 사업이 처음은 아니다. 접었던 사업을 다시 추진하는 것이다. 파운드리가 낯선 분야가 아니라는 뜻이다. 인텔은 기술력에서도 자신감을 드러내 왔다. 지난 1월 겔싱어 CEO는 작년 4분기 컨퍼런스콜에서 “7나노미터 공정의 문제를 해결했다”면서 “2023년 출시할 7나노 프로세서 대부분은 자체 생산할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국내 반도체 업계는 긴장감이 역력하다. 한 반도체 기업 관계자는 “삼성과 TSMC는 5나노 공정에 이미 도달했기 때문에 인텔이 당장 기술력에서 따라오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면서 “하지만 그간 고성능 CPU 설계 생산에서 축적한 노하우가 상당할 것으로 보여 파운드리 분야에서 인텔이 빠르게 추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르네사스 화재, 차량용반도체 공급난 심화
완성차 업계가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을 겪고 있다.
이처럼 파운드리 업계가 새로운 도전자를 맞이한 사이 차량용 반도체는 공급난이 더욱 심각한 상태에 빠졌다. 지난 19일(현지시간) 발생한 일본 르네사스 나카공장 화재 때문이다.
이에 앞서 이 분야 1위인 네덜란드 NXP, 2위인 독일 인피니언은 지난달 미국 텍사스 한파에 따른 정전으로 현지 공장 가동을 멈춘 바 있다. 이런 와중에 르네사스 화재가 벌어지면서 차량용반도체 세계 1~3위 기업이 일제히 생산 차질을 겪게 된 것이다.
차량용 반도체 시장이 비슷한 시기에 겹악재를 마주한 상황이다. 불이 난 르네사스 나카공장은 르네사스의 일본 사업장 9곳 중 가장 규모가 큰 곳이다. 르네사스가 생산하는 반도체의 40%가 여기서 나온다. 또 해당 물량의 60%가 차량용 반도체이다. 이 공장에서 나온 상당량의 반도체가 도요타와 닛산 등 일본 내 완성차 기업들에 납품됐다.
특히 르네사스는 지난해 말부터 대만 TSMC 등 파운드리 업체에 맡겼던 물량마저 자체 공장으로 전환했다. 미중 무역갈등 등 글로벌 무역시장의 불확실성이 해소될 기미가 안 보이자 자국 생산량을 늘리려던 조치였다.
니혼게이자이신문 등 일본 현지 언론에 따르면 르네사스가 생산을 재개하려면 약 3개월여의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관측된다.
자연히 현대차 등 국내 완성차 기업도 속앓이를 할 수밖에 없다. 업계 세계 1~3위 기업이 일제히 생산차질을 빚은 만큼,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 전부가 차량용 반도체의 수급불균형에 허덕일 수밖에 없어서다. 현대차와 기아차는 오는 2분기부터 실질적인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현재 갖춘 재고분이 이때쯤 소진될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현대차측은 “르네사스 화재에 따른 직접적인 피해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면서도 “다만 일주일 단위로 차량용 반도체 재고분량을 확인하는 동시에 기타 여러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당장 정부가 응급조치를 위해 지원사격에 나선 상태다. 최근 산업통상자원부 등 관계부처 관계자가 대만으로 가 차량용 반도체 조달을 요청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들은 현지에서 왕메이화 경제부장(장관)을 비롯한 정부·재계 인사들을 만나 “대만의 반도체 위탁생산업체인 TSMC나 UMC 등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에 더해 정부는 차량용 반도체 기술의 국산화 지원에도 나설 방침이다. 지난 10일 ‘차량용 반도체 단기 수급 대응 및 산업역량 강화 전략’을 발표한 산업부 등 관계부처는 “차세대 지능형 반도체 기술개발 사업, 자율주행 기술개발 혁신사업 등 관련 연구개발(R&D)을 통해 차량용 반도체·부품 자립화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반도체 제조 시 필수품’
희토류도 수급 차질
한편 중국에서는 미얀마에서 들여오던 희토류 수입에 차질이 생겼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희토류는 반도체와 같은 전자제품 및 군사 무기 등 다양한 첨단 제조품에 들어가는 필수 원료이다. 중국은 세계 1위의 희토류 매장 국가이지만 ‘중(重)희토류’는 미얀마로부터 상당량 수입에 의존해 왔다. 중희토류는 경(輕)희토류보다 가치가 높아 산업 분야에서 보다 요긴하게 쓰인다고 알려졌다.
중국의 글로벌타임스 등 현지 언론은 지난 22일 “중국 희토류 업체가 미얀마에서 원자재를 운송하는데 장벽에 부닥쳤다”고 보도했다. 매체에 따르면 중국 동부 장시성 간저우의 한 희토류 업체 측은 “미얀마 광산에서 희토류 채굴은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으나 (쿠데타로 인해)물류에 문제가 생겼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한동안 세계적으로 희토류 부족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주현웅 기자 chesco12@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