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채권 가이드라인 발행…사회·지속가능채권은 ‘無’

[주간한국 주현웅 기자] 환경·사회·지배구조(ESG) 등 비재무적 요소가 기업 경영의 필수 가치로 자리매김하면서, ESG 채권을 발행하는 회사도 급속도로 늘고 있다. 특히 이 같은 추세는 일시적 트렌드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도 발행 규모를 키워나갈 것이란 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하지만 이처럼 급변하는 현상에 정부와 금융당국이 속도를 못 맞춘다는 지적이 나온다. ESG채권의 가이드라인 마련 및 관련 체계를 정교화해야 한다는 조언이 나오는 이유다.
최초에 또 최초…ESG채권 태동기
(사진=픽사베이)
수많은 기업들이 올해 초부터 ESG채권 발행 소식을 전하고 있다. 금융투자(IB) 업계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일반기업의 ESG채권은 4개 발행사에서 8종목 7900억 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올해는 지난 1월 한 달간 발행된 ESG채권만 총 10종목에 약 1조 원 규모로 추산된다. 지난 3월은 한 달에만 3조 원을 넘어섰다는 분석이 다수다.
ESG채권은 발행자가 조달한 자본을 환경, 사회적 사업, 지속가능성 등을 위해서만 사용할 것을 약속하는 특수목적 채권이다. 녹색채권, 사회적채권, 지속가능채권 등으로 나뉜다. ESG가 기업의 가치 상승 및 투자 유치를 위한 주요 요소로 각광받으면서 이 같은 흐름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눈에 띄는 대목은 ESG채권을 발행한 기업들 가운데 ‘최초’ 수식어를 강조하는 곳이 많다는 점이다. 지난 3월에만 보더라도 NH투자증권이 증권업계 최초의 원화ESG 채권을, 네이버는 인터넷기업 최초의 지속가능채권을, 포스코인터내셔널은 상사업계 최초의 ESG채권을 발행했다. 이는 국내 ESG채권 시장이 이제 태동기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ESG 가치 상승을 위한 기업들의 활발한 투자유치는 긍정적 흐름으로 보이지만, 일각에서는 시장의 혼란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가이드라인조차 아예 없는 ESG채권이 존재하는 데다, 설령 기준이 있더라도 체계가 정교하지 못한 까닭에서다. 또 채권의 인증절차가 엄격하지 못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럴 경우 각 기업들의 ESG 채권으로 조달한 자본의 사용처가 불분명해지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먼저 ‘E’(환경) 부문에 해당하는 녹색채권의 경우, 환경부가 지난해 12월 마련한 가이드라인에 따라 조달자본의 사용처는 6가지로 제한된다. 이는 ▲기후변화 완화 ▲기후변화 적응 ▲천연자원 보전 ▲생물다양성 보전 ▲오염방지·관리 ▲순환자원으로의 전환 등이다. 이 가운데 한 가지만 충족하면 적격성을 인정받는다.
기준 없고 체계 미흡, 열풍 속 혼란 우려
환경부 녹색채권 가이드라인 표지.(사진=환경부 제공)
문제는 이들 기준 자체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예컨대 한국수자원공사는 지난달 17일 녹색채권을 발행해 500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사용처는 물환경 개선을 위한 상수도 노후관 개량 및 확충 등의 재원으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환경부 가이드라인의 ‘오염방지·관리’에 해당하는 항목이지만 이를 바라보는 시각 차이는 없지 않다. 업계에서는 “노후한 상수도 개선으로 물환경이야 좋아지겠지만, 단순 시설 개·보수로 볼 수도 있는 부분”이라는 말도 나온다.
채권 인증의 신뢰도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녹색채권에 대한 신용등급 평가는 단 한 곳에서 이뤄진다. 일반 회사채가 2곳 이상의 기관에서 인증·검증을 받아야하는 점에 비춰보면, 발행 규정이 느슨한 셈이다.
지현영 환경 변호사(사단법인 두루)는 “제도상의 채권 인검증 절차가 엄격하지 못하면, 오히려 신용평사가 발행처의 선택을 받으려는 경쟁에 ‘을’의 위치가 될 수 있다”며 “그럴 경우 신용평가의 신뢰성이 의심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지 변호사는 이어 “최근 일부 금융사의 사례를 보면 ‘미세먼지 개선을 위한 통장 개설’ 등 유치한 수준의 활동으로 ESG 상승 노력을 소개하곤 한다”며 “녹색채권으로 유입한 자본의 사용처는 실제로 얼마나 환경 개선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측정하는 기준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부연했다.
그나마 녹색채권은 여건이 좋은 편이다. 사회적채권과 지속가능채권은 가이드라인 자체가 없다. 때문에 두 채권에 대한 판단이 신용평가사별로 제각각 나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알려졌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등급뿐만 아니라 발행 가능 여부 자체가 천차만별”이라며 “특히 지속가능채권의 경우 환경(E)과 사회(S)부문이 결합됐기에, 대개 녹색채권보다 규모가 큰데 평가의 잣대가 없어서 답답하다”고 전했다.
시장에서는 정부가 이 같은 애로사항에 신속히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ESG가 글로벌 경영의 화두가 된 가운데, 한국도 기민하게 대응하려면 제도적 토대 마련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윤원태 SK증권 연구원은 “ESG채권 시장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발행자, 투자자, 평가사, 정책가이드라인이 필수적으로 틀을 갖춰야 한다”며 “2018~2020년 동안 ESG채권 발행은 증가했으나 ESG채권 시장은 민간의 자율에 맡겨진 상황에서 ESG채권에 대한 정책적 가이드라인이나, ESG채권 평가와 관련하여 적정 평가사에 대한 선정과 평가방법론도 결정된 것이 없었다”고 꼬집었다.
윤 연구원은 이어 “환경부에서 발표한 ‘녹색채권 가이드라인’은 그동안 민간의 자율적 판단과 절차로 발행됐던 ESG 채권에 정책당국이 최초로 제시한 가이드라인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면서도 “다만 국내 ESG 채권 시장은 녹색채권보다 사회적채권의 비중이 높은 상황이기 때문에 사회적채권 발행을 위한 가이드라인 및 정의 수립이 가장 시급하다”고 진단했다.




주현웅 기자 chesco12@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