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균의 개그펀치] 웬수는 따로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었을 것으로 기억된다. 학교에서 6.25를 기념해서인지 아니면 정기적인 행사였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피훈련을 했던 적이 있었다. 북한이 남침을 해오면 어떠어떠한 요령으로 숨어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훈련이었다.

먼저 요란하고도 불길한 사이렌이 울리자 어린 우리는 선생님이 가르쳐준 대로 책상 밑에 쪼그리고 앉았다. 각종 유독가스로부터 신체기관을 보호하려면 양쪽 엄지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나머지로는 얼굴 전체를 가린 채 머리를 깊숙이 숙이고 있어야 한다는 요령을 철저히 따르며 다리가 저리도록 앉아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사이렌이 울리면 질서정연하게 운동장으로 집결을 했다. 넓은 운동장 가장자리에 전교생이 반별로 모여 앉아 무시무시한 사이렌 소리와 마이크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갖가지 효과음에 온몸과 정신을 맡겨야 했다. 북한군이 공습을 해온다는 아나운서의 급박한 목소리와 투타타타 울리는 비행기의 굉음은 마치 곁에서 들리는 것처럼 온몸이 떨리도록 충격적이고 생생했다.

어린 나는 훈련인지 현실인지 확실한 구분을 하지 못했다. 그저 배운대로 쪼그리고 앉아 운동장 한가운데에 폭탄이 떨어지면 어쩌나, 북한군이 학교 운동장까지 땅굴을 파고 들어와서 우리를 죽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가득했었다. 너무 무서우니까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그저 속으로 엄마를 찾으며 어서 그 시간이 지나가주길 고대했던 뚜렷한 기억.

철이 들고부터 그렇게 자랐다. 역사를 배우기 전에 이미 무찔러야 할 적이 누구인지, 민족의 처절한 원수가 누구인지 습득했다. 반복적인 학습의 효과는 무섭도록 확실한 것이었다. 해마다 햇빛이 뜨거워지는 6월이 되면 상상이 허락하는 모든 가능성을 동원해서 머리에 뿔이 나고 우리를 잡아먹는 괴물의 모습으로 북한군 그림을 그리고, 200자 원고지에 그 괴물을 어떻게 무찔러야 할지 써내곤 했다.

그 뿐인가. 햇빛에 머리통이 익을 정도의 열기를 그대로 감수하며 어린 연사가 토해해는 웅변을 들어야 했고, 무슨 연맹에서 나왔다는 어른이나 귀순용사의 이야기에 몸을 떨었다. 조금 자라서는 그 시간이 하루 공부를 땡땡이치는 행운의 시간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오랜 시간 익숙해진 철저한 반공의 숨결을 다시금 확인하는 거역할 수 없는 행사였다.

그렇게 자랐는데 세상은 마치 뒤집어진 듯이 변해가고 있다. 어제는 원수라더니 이제는 동포고 한민족이라고 북한 사람들만 서울에 뜨면 온 국민이 들떠서 스타를 향하는 열성팬의 눈빛으로 환호한다. 같이 환호하면서도 어딘지 마음 한편에서는 자라온 시간에 대한 의문과 의심이 고스란히 남아있기도 하다.

내 고등학교 친구는 해마다 6.25가 돌아오면 비명에 가신 큰집 어른을 잊지 못하는 아픈 시간을 되새김질 하고 있다. 그 친구의 큰집 어른은 오래 전에 폭탄 파편을 가슴에 안고 비명에 돌아가셨다. 그것은 한 가정의 커다란 비극이었다.

그 친구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으로 큰집 어른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자세한 내막을 들었다. 그때까지는 막연하게 제사에만 참석했다가 나름대로 머리통이 커지니까 집안의 비극적인 내막을 자세히 알아야 겠다는 일종의 역사적 사명감을 띤 경건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큰어머니, 큰아버지는 북한군의 폭탄에 맞아서 돌아가셨는데 그거 어느 전투에서 그러신거였어요? 훈장은 안받았어요?” 그러자 친구의 큰어머니는 두 눈을 둥그렇게 뜨시더니 머리통을 쥐어박으며 말씀하셨다.

“얘가 뭔소리야? 큰아버지가 폭탄 때문에 돌아기시기는 했는데 전투라니? 쯧쯧, 그 양반이 그날 술이 좀 과했지. 약주를 드셨으면 그냥 집에서 주무실 것인지 뒷산엔 뭐하러 가서 또 마신다고…. 술 한잔 더 한다고 뒷산에 갔는데 6.25때 불발탄이 하나 발견됐거든. 그냥 신고를 하면 좋았을걸, 그걸 술김에 분해한다고 함부로 만졌다가…. 에이구, 그놈의 술이 웬수지.”

장덕균


입력시간 : 2003-09-30 14:40


장덕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