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되돌리기] 지구를 지켜라


‘덤벼라 외계인! 우리에겐 병구가 있다’, ‘범우주적 코믹 납치극’. 영화 <지구를 지켜라>의 포스터 문구이다. 여기에다 물파스를 들고 순진한 웃음을 짓는 배우 신하균의 얼굴이 그려져 있어, 포스터만 보면 황당한 엽기 코미디 영화가 떠오른다.

‘엽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우리나라 네티즌들이 이 영화를 절대로 가만 놔두지 않았을 법도 한데, 어찌된 일인지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다. 관객의 엽기코드와 이 영화의 엽기코드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양봉업을 주업으로 하며 간간이 마네킹 만드는 일을 하는 주인공 병구는 머지않아 외계인의 계략으로 지구가 멸망한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의 추론에 따르면 음모의 배후에 유제화학 사장 강만식이 있다. 안드레메다 별의 외계인인 그는 외계의 로얄 패밀리들과 교신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이 모든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는 지구인 병구는 외계인 강만식을 납치한다. 그를 통해 안드로메다 별의 왕자를 만나 그들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서다.

병구는 강만식을 납치하기 위해 오랜 시간 외계인의 생태를 연구한다. 그들의 머리카락은 텔레파시를 주고받는 교신 안테나이고 그들의 취약 부위는 눈과 발등, 은밀한 그곳이고, 외계인들의 신경조직은 때밀이 수건와 물파스에 무기력하다. 병구는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외계인 강만식을 고문하기 시작한다. 머리를 밀고, 취약 부위에 때밀이 수건을 이용해 살갗을 벗긴 후 물파스를 바른다. 강만식은 고통에 절규한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통증에 당황하는 것은 강만식 뿐만이 아니다. 물파스를 집어든 순진한 신하균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을 관객 역시 뼛속 까지 스며드는 화끈한 물파스의 열기를 떠올리며 온몸을 움찔한다. 이 순간 눈치 빠른 관객은 이 영화가 앞으로 스플래터(Splatter: 피가 낭자한 호러영화. 과장이 심해 웃음을 유발함)호러로 진행될 것을 직감한다.

영화 광고 카피의 사탕발림에 속은 관객에겐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태가 아닐 수 없다. B급 호러영화에 애정이 없는 대부분의 관객이 이 영화에 퇴짜를 놓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호러영화라고만 단정지을 수 없는 뭔가 다른 구석이 있다. 그것은 납치된 외계인 강만식이 자본가계급이고 그를 납치한 꼴통 병구가 노동자계급이라는 사실에서 쉽게 읽어낼 수 있다. 주인공 병구의 삶을 관통하는 것은 유산자와 무산자의 계급 갈등이다.

광부인 아버지와 화학회사에 다니는 어머니, 공장에 다니는 애인이 사고로 죽게 되면서 병구는 그를 둘러싼 모든 비극이 악랄한 자본가계급의 획책이고 그들은 인간의 탈을 쓴 이종(異種) 생명체라고 믿기 시작한다. 그리고 지구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교활한 이들 세력을 제거해야만 한다. 이쯤 되면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고 외치는 대단한 좌파영화가 한 편 탄생한 듯 싶다.

하지만 결말이 그렇게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있지는 않다. 영화는 지구적 관점에서 자본가계급을 비난하다가 어느덧 은하계 관점에서 인간을 고발하기에 이른다. 외계인임을 자백한 강만식은 지구를 파괴해야 하는 이유로 1,2차 대전에서 드러난 인간들의 공격 성향을 들먹인다.

한마디로 지구를 파괴하는 것이 인간들 자신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얘기하다가 생뚱맞게 ‘인간은 모두 악하다’라고 말해버리는 논점일탈의 오류와 같다. 감독의 상상력이 은하계로 확장되자 비판의 초점이 흐려진 모양이다. 하긴, 황당한 코미디에서 스플래터, 좌파영화 그리고 허무와 염세의 SF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논지는 흔들리기 마련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이종(異種)교배에 성공한 축이니 큰 허물은 아니다.

정선영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3-10-16 17:05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