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행 여부 떠나 모두가 피해자, 솔로몬의 지혜 찾아야과민한 언론기피, 무조건적인 취재관행에도 문제

김병현 파문, "법대로" 만이 능사일까
폭행 여부 떠나 모두가 피해자, 솔로몬의 지혜 찾아야
과민한 언론기피, 무조건적인 취재관행에도 문제


고소인과 피고소인으로 맞붙은 20대의 두 청년. 한쪽은 폭행을 당했다며 피해자임을 내세우고, 다른 한쪽은 폭행을 행사하지는 않았다며 가해자임을 부인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현실은 양쪽 어느 누구에게도 유리하지 않게 흘러 가고 있다. 사건의 본질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수박겉 핥는 가십 거리만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사법적인 판단에 앞서, 모두 피해자라는 ‘쌍피론’이 현실적으로 설득력을 얻고 있다.

메이저리거 김병현(24ㆍ보스턴 레드삭스)선수의 돌발적인 폭행 뉴스가 야구팬 뿐 아니라 전국민에게 뜨거운 관심사로 대두된 지난 한 주였다. 고소인 이건(29ㆍ굿데이 사진 기자)씨와의 폭행 사실 여부를 둘러싼 공방에서 목격자들의 엇갈린 증언과 네티즌들의 열띤 반응까지, 김병현 선수는 오프 시즌의 뜨거운 감자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복합적 의미까지 뒤엉키면서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져 간다. 스포츠 스타와 기자의 단순한 다툼이 아니라는 것이다. 팬들과 소속 언론사의 대리전,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취재 관행의 충돌 등 언론 환경에서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갈등이 복합적으로 뒤섞인 양상이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가

11월 8일 오후 8시. 부슬비가 내리는 스산한 날씨의 주말이었다. 귀국후 잠행중이던 김병현 선수가 서울 강남구의 S스포츠센터에서 후배 한 명과 함께 운동을 마치고 나오던 순간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때마침 시즌 막바지에 잇달아 불거진 불미스러운 일들로 언론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던 김 선수는 즉각적으로 촬영을 거부했으나, 이건 기자의 카메라는 김 선수의 얼굴을 계속 담고 있었다. 곧 이어 두 사람의 실랑이가 벌어졌고, 이 와중에 카메라를 뺏으려는 김 선수와 뺏기지 않으려는 기자의 완력이 맞서며 결국 한 사람이 다치는 사태에 이르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김 선수는 후배와 함께 곧장 스포츠 센터를 나섰고, 반면 이건 기자는 부서진 카메라 장비를 수습한 후 2층 안내 데스크로 올라가 목격자가 있는 지 여부를 묻는 등 잠시 머무르다 현장을 떠났다.

김 선수는 사건 이후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이나 경찰 조사, 기자회견 등을 통해 "이건 기자가 신분도 밝히지 않았고, 허락도 없이 사진을 계속 찍어댔으며, 촬영을 제지하려 하자 '너 취재 방해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등의 반말을 했다"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반면 이건 기자는 "신분을 먼저 밝혔으며 반말은 하지 않았다"고 김 선수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는 상황. 게다가 이 부분에 대한 양측 목격자들의 진술도 두 사람의 입장과 다를 게 없다.

과연 어느 쪽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폭행은 의도했건 안 했건 결과일 뿐이다. 김 선수 역시 결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사건을 공정하게 보기 위해서는 결과를 낳은 원인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변수다. 사건을 맡고 있는 강남 경찰서 관계자는 "김병현 선수와 이건 기자의 진술이 대부분 일치하지만 특정 대목에선 엇갈린다"고 말했다. 사건의 발단에 대한 양측의 진술이 정면 배치하고 있다.

그날 사건의 현장에 양측의 말을 들은 목격자들이 다수 있었다면 진실은 금세 드러나겠지만, 불행히도 객관적인 증언을 해줄 수 있는 목격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사건이 벌어진 시점은 스포츠센터가 문을 닫기 얼마 전의 시각으로, 1층 로비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현장을 눈 앞에서 볼 수 있는 매장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날 그 순간을 목격하지는 못했던 것.

당시 스포츠 용품점은 이미 문을 닫은 뒤였고, 커피숍에선 음악을 틀어 놓고 장부 정리에 열중한 직원 한 명만이 있을 뿐이었다. 사건 현장과는 불과 4~5m 거리밖에 안 떨어진 커피숍의 한 직원은 "뭔가 둔탁한 소리를 들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카메라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김 선수와 기자 사이에 오간 대화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고 밝혔다.

2층 안내 데스크 직원들의 증언은 이와 약간 다르다. "툭탁툭탁 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흔히 있는 정도의 몸싸움 정도로 생각했다. 고성이 오가거나 다투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업무 규정상 자리를 뜨는 데 제약이 있어 잠자코 있다가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내려다 봤을 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후였다. 김 선수 일행은 그냥 나가는 중이었고 기자는 장비를 수습하고 있었다."

결국 김 선수와 기자 사이에 '반말과 무례'를 두고 서로 엇갈리는 주장은 현재로선 확인이 어렵다. 다만 한 쪽이 거짓을 말하고 있다면, 그 쪽이 먼저 양심선언을 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셈이다.


폭행사건은 원인보다는 결과가 중요

이번 사건의 고소인 이건 기자는 김병현 선수를 '폭행 및 재물 손괴' 혐의로 고소했다. 지금 시점에서 명확한 것은 카메라가 부서졌다는 사실뿐이다. 이건 기자는 김 선수가 폭행을 행사했다고 믿고 있지만, 김 선수는 의도적인 폭력 행사가 아닌 데다 실랑이 과정에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폭행 혐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경찰은 그러나 고소인측이 내세운 폭행 혐의를 인정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사건 당시 현장 상황 일부를 담은 CCTV 화면에 폭행 혐의를 입증할 만한 내용이 담겨 있다고 밝힌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일선 경찰 관계자들은 “통상 폭행 사건을 처리할 때 원인은 그다지 중시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폭행이 일어났느냐 아니냐가 사법적 판단의 준거가 된다"는 의견이다.

서초경찰서 백현석 경위는 "김병현 선수의 주장대로 기자가 반말조로 말을 하고 무례하게 대했다면, 김 선수의 행동은 자신의 인격 훼손에 대한 '정당행위'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경우, 서구라면 폭넓게 무죄를 인정하는 것이 관례다.

하지만 국내 사법체계에서는 정당행위를 별로 인정하지 않는 게 관행이다. 폭행의 발생 여부가 중요한 것이다. 백 경위는 “법정에서는 폭행의 원인에 대한 고려가 이뤄진다면, 형의 선고 때 작량 감경도 있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감정적 대립은 상처만 남길 뿐

김병현 선수는 어릴 적부터 사진 찍는 일을 싫어한 데다 스타가 된 뒤에도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극히 꺼려 온 성격의 소유자다. 게다가 이번 귀국길은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은 철저한 잠행이었다.

반면 김병현 선수 같은 대스타의 귀국을 놓칠 리가 없는 게 한국 언론이다. 이건 기자가 소속된 굿데이를 포함한 여타 스포츠지뿐만 아니라 대다수 언론이 그렇다. 이건 기자 역시 데스크의 지시를 받아 '잠수중인' 김 선수를 물 위로 끌어올려 국민에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번 사건의 궁극적인 원인은 사생활을 보호 받으려는 한 스타와, 그를 취재하기 위해 온갖 궁리를 다 하는 언론의 취재 관행 사이에 빚어진 충돌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서로를 존중하는 절차가 선행됐다면 과연 이런 사태가 일어났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와 관련, 이번 사건에 대한 일선 기자들의 견해도 상당 부분 엇갈리고 있다. 결과론에 치우친 쪽은 "김병현 선수가 무조건 잘못했다"고 말하는 반면, 원인론에 무게를 두는 쪽은 "아무리 기자라 하더라도 취재원이 수긍할 만한 방식으로 접근했어야 옳았다"는 입장이다.

일부 언론 전문가들은 점잖게 지적한다. "국민의 알 권리도 중요하지만, 정작 그것을 내세우는 언론의 뒤에는 상업성이 있지 않나. 무한경쟁으로 치닫는 한국의 스포츠 저널리즘은 이를 한번쯤 재고해 봐야 할 때"라고.

이건 기자의 소속사인 굿데이는 폭행 파문이 터진 이후 줄곧 고소인의 대리인을 자처하며, 사건을 확대 재생산 해왔다. 하지만 입장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15일자 1면에 실린 "이 기자 만나고 싶지만-김병현, 용서해줄 수도 있는데-이건 기자"란 제목의 머릿기사가 확정적 단서다. 처음엔 싸움을 키워가는 방향이었지만, 이제 화해를 하자는 쪽으로 사건의 머리를 틀었다.

하지만 김병현 선수는 오히려 굿데이를 초상권 침해 등의 이유로 법의 심판대로 몰고 가는 역공에 나섰다. 이번 사건이 어디로 튈 지 모르는 형국에까지 들어선 것이다.

답답한 것은 예기치 못 한 싸움을 지켜 보게 된 국민이다. 촉망 받는 대투수가 엉뚱한 사건에 휘말려 혹시나 망가지지는 않을지, 언론은 또 감정적 대립이 앞서 본연의 소임에 부실해지지나 않을 지…. 관전석의 궁금증만 커져 간다.

김윤현 기자


입력시간 : 2003-11-19 15:52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