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28 딸기띠로 사는 활화산 같은 무대 위의 여걸

[추억의 LP여행] 한영애(下)
영원한 28 딸기띠로 사는 활화산 같은 무대 위의 여걸

한영애는 베일에 가려진 음반이 많은 가수다. 혼성 포크 그룹 해바라기 활동(1977~78년) 이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데뷔 음반이 세상에 나왔다. 최초의 음반은 76년에 발매된 3인의 ‘스플릿 앨범’(공동 앨범)인 <백호빈·오종국·한영애/사랑의 편지ㆍ힛트>. " 신기하네요. 녹음을 했으니까 나왔을 텐데. 이 음반은 해바라기 전인가요? 왜 녹음했는지 조차 생각이 나지 않아요." 76년 혼성포크 그룹 해바라기에 합류한 한영애는 이촌동 서울스튜디오 녹음에 참여해 리더 이정선, 이주호, 김영미와 함께 <해바라기 1집ㆍ지구.1977>을 발표했다. 당시 특별한 목표도 없었지만 포크 음악만으로는 넘쳐 나는 열정을 주체하지 못하던 그녀는 77년 12월 창고극장의 '덧치맨'에 출연하며 연극 쪽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77년 비공식 첫 독집 <어젯밤 꿈ㆍ지구>에 이어 78년, 군입대로 이주호가 빠지고 이광조가 가세한 해바라기 2집과 비공식 2집<작은 동산ㆍ1978>을 연이어 발표하는 등 음악과 연극 활동을 병행했다. " 대중적이지 않다며 제대로 판매도 하지 않았던 2집 음반은 노래를 다시 시작하니까 다시 판매를 하더군요. 화가 나서 신세기레코드로 찾아가 판권을 사려고도 했었지요." 비공식 두 음반에 대해 한영애는 "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이정선ㆍ오세은씨의 음반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최근까지도 앞서 발표한 음반이 늘 부담스러워 존재 자체를 부정해 왔다. "그 음반들을 생각할 때면 태평양 가서 빠트리는 꿈, 마스터 테이프를 찾아 와서 불지르는 꿈을 꾸기도 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인가 그래도 내 역사인데 싶어, 껴안게 되더군요. 오히려 가수 지망생들이 나의 이런 역사를 보고 데뷔 때 생각 없이 판을 내지 말고 확실한 프로듀서를 만나야 된다는 생각을 하면 좋겠어요."

통기타 시절 담백한 스타일의 보컬로 자신을 감춘 한영애의 가슴속에는 사실 활화산 같은 뜨거운 감성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79년 말 극단 자유의 배우 시절, 한영애는 카페 '장미의 숲'에서 이영재ㆍ조덕환과 함께 트리오를 구성해 연습 삼아 노래를 불렀다. 당시 레퍼토리는 나중에 들국화 노래로 알려진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세계로 가는 기차’ 등. 또한 여의도 관광호텔에서 전인권ㆍ이영재ㆍ권혁수 등이 여자 싱어가 필요하다고 해 잠깐씩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이때부터 한영애는 록으로의 음악적 변신을 시도했다. 1983년까지 극단 생활을 하면서 연극에도 어느 정도 한계를 느꼈다.

30세를 넘기면서 자신이 그 동안 느껴온 오랜 갈증의 정체는 노래임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1985년 이정선의 집에 놀러 갔다가 공식 1집 <한영애/여울목.1986>을 녹음하게 되었다. 이 음반은 비공식 2집 제작 때 아픔을 겪었던 오세은이 기획을 했다. 이때 한영애가 가져 온 이영훈의 곡들이 마음에 들지 않은 오세은이 한돌의 곡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당시 퇴짜를 맞은 '사랑이 지나가면' 등은 후에 이문세가 빅히트를 기록했다. 하지만 수록곡 <건널 수 없는 강>은 한영애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정서를 가진, 울부짖는 곡이었다. 이후 그녀는 프랑스 파리의 시립음악원으로 유학을 다녀 와 86년 서울예술대학 연극과에 뒤늦게 입학, 만학의 열정을 불태웠다.

이정선의 기획으로 발표된 프로젝트 음반 해바라기 3집과 엄인호, 이정선, 김현식과 함께 결성한 프로젝트 노래 모임인 신촌블루스의 1집 음반에도 참여했다. 88년에는 히트곡 ‘누구 없소’가 수록된 2집 <바라본다ㆍ서라벌>를 발표했다. 김수철의 도움을 받아 한영애가 처음으로 기획한 이 음반으로 50만장 이상이 팔려나가는 빅 히트를 터트리며 비로소 일반 대중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옛날에는 튀는 테크닉이나 성량보다는 화합하며 자제했어야 했어요. 헌데 솔로 2집 낼 때는 절제할 필요 없이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노래했어요.

내 뱃속에 이런 소리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되면서 소리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지요." 그 해 대구 동아문화센터에서 첫 개인콘서트를 개최한 한영애는 오세은의 4집 '남사당'에 보컬로 참여하면서 국악에도 눈을 뜨기 시작했다. 92년 처음으로 작곡한 '말도 안돼'가 수록된 3집에 이어 93년에는 당시 사회에 화제를 뿌렸던 '김민기 1~4'에 참여?'기지촌'을 불렀다. 또한 그 해, 63빌딩에서 성황리에 '아우성' 공연을 개최했다. 매니저를 두기 시작한 4집<불어오라 바람아.1995>은 가수에서 아티스트로의 탄생을 외치는 선언 같았다. 기타리스트 이병우와 작업한 이 음반은 그녀가 가장 애정을 갖는 음반. 97년, 대중 음악 뿌리 찾기라는 화두로 참여한 신중현 헌정 앨범에서는 공연 기획을 맡았다. 99년엔 테크노와 결합한 5집 <난.다>를 발표하며 또 한번 변신을 꾀했다.

이후 열정적인 목소리 뿐 아니라 갖가지 동작과 소품 등 시각을 강조한 다채로운 기획으로 변신하는 이미지를 콘서트 때마다 창출해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KBS 제2FM <뮤직스테이션> 진행자로 변신한 그녀는 작년에는 김포 복숭아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트로트 앨범 으로 또 다시 새로운 기획을 선보였다. 미혼인 그녀는 "남들처럼 사춘기의 방황과 남자를 처음 만났을 때의 환희와 환상이 깨지는 경험들도 했다"고 고백한다. 지금은 삶의 미덕 중 '정직함'에 가장 가치를 둔다. 록과 블루스에 뿌리를 두고 튀지 않는 형태로 국악기를 접목하는 음악을 꿈꾸는 “ 28살 딸기 띠” 가수 한영애. 끊임없이 아이디어 연구에 몰두하는 그녀의 음악 인생은 현재 진행형의 싱그러운 젊음 덕에 언제까지나 여전하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01-15 16:59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