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균의 개그펀치] 까라면 까던 시절


언젠가 여자후배 작가가 친구와 전화통화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제일 먼저 결혼을 한 축에 속하는 후배에게 신혼의 친구가 조언인지 하소연을 하는 눈치였다. 연신 응, 응, 하면서 듣고 있던 후배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 아무래도 대등한 관계에서 시작한 게 아니니까 좀 그렇더라. 나도 애 아빠가 학교 선배였 으니까 처음부터 한수 접고 시작한 느낌이었다니까. 지금도 그렇고, 연애 상대로서가 아니라 선배 , 후배로 먼저 시작해서 그런지 좀 어려운 데가 있지. 함부로 막말하기도 그렇고, 너도 직장 상사 였으니까 그 상하 관계가 아직도 남아 있을거야."

짐작컨대 직장 상사였던 남자와 결혼한 후배의 친구가 결혼 생활에서도 그때의 위계질서가 느껴진 다며 어려움을 토로하는 듯 했고 후배는 충분히 공감한다며 맞장구를 치는 듯 했다.

지금이야 어떤지 알 수 없지만 내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선배의 말은 하늘이었다. 선배가 뛰라 면 뛰고 마시라면 대낮부터 꼭지가 돌도록 마셔야 하는건 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일이 있다.

졸업반 때였던가. 군대 갔다가 복학한 선배가 마음먹고 후배들을 잡겠다고 나섰다. 2학기에 복학 한 선배는 개강 첫날 인상을 잔뜩 구기며 과 후배들을 일렬로 세우고 군기를 잡았다. "내가 다닐 때 우리 문창과(문예창작과) 분위기는 이렇지 않았어. 그런 썩은 가슴으로 시를 써? 소설을 써?"

잔뜩 얼어붙은 후배들은 모욕적인 질책과 얼차려를 당하면서도 누구 하나 말대꾸도 못했다. 우리 는 뒤에서 연신 키득대며 선배가 후배 군기 잡는 모습을 지켜봤는데 그 선배가 방위 출신이라는 건 절대 발설할 수 없었다. 아, 그때 선배에게 드잡이를 당하던 후배 중에는 현역을 마치고 뒤늦 게 대학에 입학한 만학도도 있었는데…

우리 사회에서 선배라는 개념은 참으로 강력하다. 학교건 군대건 나이와 상관없이 선배라면 그저 한수 접고 들어가는 게 신상에 이로울 정도이다. 내가 작가생활을 일찍 시작했기 때문에 처음 몇 년 동안은 늘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후배로 들어왔다. 비슷한 연배면 괜찮은데 나보다 나 이가 서너 살은 많은 신참 작가들이 깍듯이 '선배님'이라고 부를 때면 속으로 난처함 마음도 있어 서 누가 나이를 물어보면 어물어물 넘기는 일도 많았다.

연예계에서도 선배와 후배의 상하관계는 아주 뚜렸했지만 지금은 예전에 비해서 많이 말랑말랑해 졌다. 옛날에 선배를 하늘같이 떠받들던 후배 들이 지금의 나이어린 후배들의 되바라진 행동에 혀 를 차는 일이 다반사이다. 아니할 말로 '먼저 떠서 스타가 되면 선배' 라는 자조적인 말도 흘러 나온다.

개그맨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MC로 더 큰 인기를 끌고 있는 A가 신인이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선배들이 눈만 치켜 떠도 절절 매던 시절이라 신참 개그맨인 A로서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 런데 하루는 연습시간에 늦고 말았다. "오다가 교통사고가 났어요. 제 차가 엄청 찌그러지고, 간 신히 시동 걸고 오느라고…."

군기 잡기로 유명했던 선배가 눈을 치뜨고 험악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자 A는 엉겁결에 거짓말을 늘어 놓았다. "그래? 정말이지?" "그럼요, 제 차 찌그러진 거 보시면 안 죽고 있는 게 신기할 정 도라니까요." "좋아, 이따가 연습 끝나고 니 차 확인해 본다."

선배의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A는 거짓말한게 탄로 날까 봐 연습 중간에 몰래 빠져 나와 멀쩡 한 차를 전봇대에 충돌시켜서 일부러 찌그러뜨려 버렸다.

"엉엉엉, 뽑은 지 얼마 안 된 새찬데. 엉엉엉." 요즘 이렇게 까지 선배를 무서워하는 순진한 후배 들이 있을지…. 아마 없겠지.

입력시간 : 2004-01-30 20:37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