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가수의 대명사 '빈잔' 자세로 꾸준한 활동

[추억의 LP 여행] 남진(下)
라이벌 가수의 대명사 '빈잔' 자세로 꾸준한 활동

첫 리사이틀에 이어 1972년 초에 벌어진 두 사람 리사이틀 재대결은 장군멍군 식으로 이번에는 나훈아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인기 경쟁이 지나치게 되자 노래보다는 묘기까지 부리는 무리수를 두기도 했다. 시민회관의 KBS 가수청백전. 남진, 나훈아 양측은 서로 꽃다발 공세, 화환 숫자 늘리기로 인기 세몰이는 기본이고 무대에서 여성 팬들과 키스신까지 연출했다. 방송 때는 남진, 나훈아에 등장할 때만 소녀 팬들의 아우성이 이어지고 다른 가수들의 무대는 썰렁한 무관심으로 일관되는 등 부작용도 심각했다.

결국 라이벌 관계는 지구와 오아시스 레코드회사 간의 전쟁으로 치달았다. 사고가 터졌다. 그해 6월 남진의 팬을 자처했던 김웅철은 사이다 병을 휘둘러 나훈아를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의혹의 눈길은 따가웠지만 결백함을 주장했던 남진은 이 사건으로 가수 분과위에서 제명 위기를 겪는 등 큰 곤혹을 치렀다. 이처럼 불미스러운 일도 많았지만 남진, 나훈아의 사력을 다했던 경쟁은 후배 가수들에겐 의욕을 주고 불황에 허덕이는 대중 음악계에는 팬들의 관심을 불러 모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대결은 70년대 내내 팬들의 관심을 증폭시켰다.

72년 10월, 미국 공연 때는 오색 창연한 불빛이 배터리로 작동되는 25만원짜리 사이키델릭 무대 복을 구입했다. 이 옷은 엘비스 프레슬 리가 호놀룰루 공연 때 선보였던 무대 복과 같은 디자인이었다. 73년 3회 리사이틀에서는 이 무대 복장으로 등장해 '동양의 프레슬리'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 해 TBC 방송가요 대상은 그의 몫이었다. 그는 71년 한국 무대 예술 대상, 71ㆍ72ㆍ73년에는 MBC가 주관하는 가수왕 등극, 67ㆍ71ㆍ72ㆍ73ㆍ74ㆍ75년에는 10대 가수상 선정 등 70년대 중반까지 화려한 수상 퍼레이드를 벌였다. 72년에는 7천명 규모의 팬클럽을 결성해 이듬해 5월 남이섬에서 야외 잔치를 벌여 화제가 되었다. 그의 팬클럽은 '박수 부대', 무더기 희망 곡 ‘엽서 부대'로 일부 비난을 받기도 했다. 남진은 극성 여성 팬들의 등쌀에 항상 시달렸다. 꽃다발 공세는 기본이고 목에 매달리고 키스를 하려들고 몸의 일부를 만지고 붙잡기는 예사로 벌어졌다. 심지어 숙소에 속옷차림으로 들어오는 여성 팬도 있었다.

남진의 전성기 당시 히트곡들은 대부분 박춘석과 정두수의 합작품. 박춘석씨는 의리가 강한 남진을 누구보다도 아꼈다. 이들 히트곡 제조 트리오는 동아방송에서 처음 만났다. 74년 1월 레코드 계의 혁명이 일어났다. '박춘석 프로덕션'의 탄생이 그것. 남진은 이미자 등과 함께 스승인 박춘석 정두수 씨를 따라 대도 레코드사로 둥지를 옮겼다. 이때 남진은 레코드가 팔리는 숫자대로 게런티를 받는 국내 최초의 인세 가수가 되었다.

75년 4월, 경남 창영군 대한극장 공연 때 7명의 여성 팬들이 산에서 진달래꽃을 무더기로 꺾어 꽃다발을 만들어 산림 법 위반으로 입건되는 사건이 화제가 되었다. 75년 11월에는 나훈아를 폭행했던 김웅철이 이번에는 자신을 피습하는 봉변을 겪었다. 이후 김웅철은 5년 뒤 목포의 남진 집에 불을 지르며 질긴 악연을 이어 갔다. 75년 9월, 열애 설이 나돌던 가수 윤복희와 약혼 6개월 후 파혼 선언, 2개월 후 다시 동거에 들어가는 곡예 같은 생활로 관심을 모으더니 결국 2년만인 77년 11월 정동교회에서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1977년에는 오아시스로 전속을 옮긴 이후 윤복희, 윤항기와 가족 쇼단을 구성해 활동했다. 하지만 78년 10월 대전 시민관 개관 17주년 기념 남진. 윤복희 쇼 '춤추는 함대' 공연 때 또 사건이 터졌다. 술에 취한 남성 팬들이 휘파람을 불며 야유를 하자 화가 난 남진이 객석으로 뛰어 내려가 전치 10일의 상처를 입힌 것. 불행의 전조였을까. 3년 7개월의 부부 생활 동안 아이가 없었던 남진과 윤복희는 79년 3월 결국 이혼의 아픔을 겪었다.

80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중앙교회에서 재미교포 강정연과 재혼을 하며 식품점을 경영했다. 3년 후 귀국한 남진은 박춘석의 주선으로 신보 '빈잔'을 발표했고 84년에는 목포에 하와이 관광나이트클럽을 오픈, 사업가로도 활동을 했다. 86년 남진은 신곡 '누가 아나요'를 발표했다. 우연인지 나훈아도 비슷한 시기에 신보를 발표杉? 87년부터 본격 가수 활동에 돌입한 남진은 89년 11월, 타워호텔 나이트클럽 공연을 마치고 나오다 20대 청년 3명에게 긴 칼로 허벅지 하단부를 관통 당하는 피습을 당했다. 절치부심한 남진은 1991년 가수분과위원회 14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또한 92년에는 3년 만에 신곡 '바다'를 발표하고 94년에는 힐튼호텔에서 노래인생 30년을 결산求?기념콘서트도 열었다. 98년 7월 조선일보에서 조사한 건국이후 가수 베스트50에서 10위에 랭크되는 영광을 안았다. 2000년에는 한국연예협회 제7대 이사장으로 선출되며, KBS 가요 대상 공로상을 수상했다.

최근 그의 대표 곡‘님과 함께'는 5인조 그룹 칠리에 의해 30년 만에 새롭게 리메이크 되기도 했다. 남진은 여전히 전국 투어와 신보 발표를 멈추지 않고 활동을 벌이고 있다. "저는 음반 PR을 하지 않는 가수 중 하나예요. TV도 1년에 두세 번만 나갑니다. 인위적인 히트곡은 방송이 끊기면 1년도 안 돼 사라져버려요. 반면에 좋은 노래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커져요. '빈잔' 같은 노래는 10년 만에 히트한 곡입니다."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02-19 13:59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