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 담백한 연애담

[영화 되돌리기] 봄날은 간다
솔직 담백한 연애담

“나의 모든 연애는 초판의 변형이었어.”영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High fidelity)>의 남자 주인공 존 쿠색이 연애 실패담을 되뇌이며 심드렁하게 던지는 말이다. 모든 연애가 첫사랑의 리바이벌이자, 원본의 아우라가 사라진 재탕, 삼탕의 모작이라는 말은 분명 모든 남녀가 열렬히 바라고 구하는 낭만적 사랑에 대한 불경스런 모독이다. 하지만 낭만적 사랑의 진실이란 게 아름답고 달콤한 것만은 아니다.

일찍이 수많은 사회학자들은 열렬하고 낭만적인 연애가 사실은 여자도 성의 주체로 등장시켜 더 적극적으로 성의 쾌락을 즐기려는 남성중심적인 근대화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고 폭로했고, 과학자들은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느끼는 낭만적 감정이 생식을 원활하기 하기 위해 뇌에서 일어나는 화학작용에 불과하다고 밝힌 바 있다. 즉, 낭만적 사랑은 유통기한이 있는 화학작용이자 수컷의 검은 속셈이 숨겨진 불온한 이데올로기이다.

이 뿐만 아니다. 사랑의 본질이 개체를 보편화하는 것이라는 말처럼 사랑은 천성적으로 진부하고 구태의연해지기 마련이다. 사랑에 빠지면 삼류 유행가 가사가 모두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는 말처럼 자신의 유일무이의 사랑이 갑남을녀의 통속적인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것이 낭만적 사랑의 쓸쓸한 운명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는 남자와 여자가 만난, 그렇고 그런 사랑이야기, 너무나 보편적이고 상투적이라 나의 경험담처럼 잔인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는 영화이다.

음향기사 상우와 방송국 라디오 피디 은수. 업무 때문에 시간을 같이 보낸 이 둘은 늦은 밤 허기를 채우기 위해 은수 집에서 라면을 끓여 먹는다. 저녁을 다 먹고도 허전하고 아쉬운 마음에 찾는 라면. 은수에게 사랑은 영양가는 없어도 허한 마음을 채우기에 딱인 라면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상우는 자신이 <라면같은 사랑>인지도 모르고 첫날부터 수컷같은 욕정을 드러내다가 암컷의 얄밉게 이성적인 반응에 곧바로 창피해진다.

“아, 쪽팔려”를 중얼거리며 은수 집을 나선 상우. 그래도 외로운 그녀는 언제나 <라면>을 찾아주었고 풋풋하고 설익은 상우는 그녀의 기호식품이 되어 그녀에게 충실히 응대해주었다. 하지만 상우는 자신이 북어국같은 사랑이길 원했다. 허기만 채우면 끝인 라면이 아니라 빈속을 시원한 국물로 꽉 채우고도 남는 주식이자 보양식이자 필수영양소가 되고 싶었다.

“내가 라면으로 보이니?”라고 처음으로 화를 내는 상우와 북어를 건네는 상우에게 “제발 그러지 좀 마”라고 짜증을 내는 은수. 그녀는 언제나 새로운 기호품을 찾아 떠날 사람이고 상우는 몇 달 치 김치를 담가 두고 김치가 익어가기를 기다릴 수 있는 여자를 찾을 사람이다. 결국 오래 먹은 라면이 질리자 연인은 이별의 수순을 밟아간다.

이 영화의 매력은 애틋하고 아련한 연애의 추억이 사실 초라하고 비루한 일상의 기억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데 있다. 회식 자리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볼품없이 쪼그리고 앉은 채 사랑의 밀담을 속삭이거나 늦은 밤 전화 연락을 기다리는 남자가 짜증 섞인 손놀림으로 핸드폰 벨소리만 줄기차게 바꿔대고 여자의 변심에 화가 나 그녀의 차를 열쇠로 긁어버리는 등 싱겁고 우습고 민망한 남녀의 서투른 사랑 이야기가 우리의 솔직한 연애담이다. 사랑이 식어버린 후에도 어리석게 그 사람의 품 안이 그리워지는 얄미운 그녀와, 사랑이 변할 줄 알면서도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며 속절없이 애태우는 우둔한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그’와 ‘그녀’가 아닐까?

정선영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4-03-04 15:23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