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팬 몰고다닌 대박행진 록계에 잔잔한 울림 남겨

[추억의 LP 여행] 산울림(下)
구름팬 몰고다닌 대박행진 록계에 잔잔한 울림 남겨

산울림은 고대, 중대, 경희대, 외대 등 대학에서 라디오 공개 방송과 연계된 공연을 위주로 활동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고려대 공연. "공연을 하면서 인산인해라는 걸 처음 봤어요. 고려대 운동장에서 한 시간 정도 공연을 했는데, 그 큰 운동장이 사람의 파도, 사람의 바다로 넘실댔어요" 김창완의 회고다.

데뷔 1년 만에 산울림은 1978년 TBC 가요대상 중창부문상을 수상했다. 1집의 대박에 흥분한 음반사는 2집부터 펜더, 깁슨 기타에 베이스 앰프 등 최고의 장비를 구입해 주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산울림은 2년 동안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내 마음은 황무지’ 등 히트 퍼레이드를 펼쳤다. 3집 수록 곡 중 ‘그대는 이미 나'는 실험적인 색채로 중무장한 18분 39초의 롱 버전이었다. "그 노래는 너무 길어, 라디오에서는 곡을 잘라 방송을 했다. 1, 2집의 성공에 대한 자신감이기도 하고, 조금 만용이기도 했는데 다시는 그런 건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3집까지의 노래들은 1971-1975년 사이에 만들어진 노래가 대부분이었다.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산울림은 데뷔 앨범 발표 이후 1년 2~3개월 사이에 대략 8장의 음반을 냈다.

79년 1월 TBC <쇼는 즐거워>로 첫 TV출연 후 창훈, 창익 두 동생의 군입대로 팀은 주춤거렸다. 군 입대 전에 녹음해 둔 곡으로 4집을 발매했다. 4집에는 영화, 연극, 드라마 등에 삽입한 음악들이 많이 수록되었다. 이 시기 두 동생은 육군본부 군악대에 입대해 실력을 갈고 닦았다. 5집은 두 동생의 휴가 중에 완성되었다. 또 김창환은 홀로 동요앨범 [개구장이/서라벌, 1979]와 [산 할아버지/대성, 1981]를 만들며 동요적 컨셉으로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1980년, 박동률, 유지연, 김영국 등으로 구성된 고장난 우주선이란 프로젝트팀이 6집 녹음에 참여했다. 81년 군에서 제대한 두 동생의 합류로 재가동된 산울림은 ‘가지 마오’, ‘청춘’ 등을 수록한 7집으로 KBS 가요대상 중창부문상을 수상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청춘은 애기 돌날에 만든 노래고, 독백은 둘째가 군 생활하면서 초소에서 만든 노래예요. 그래서 어머니는 ‘독백’ 노래만 나오면 그렇게 눈물을 흘리세요. 다 현실에 뿌리가 있는 노래들이예요." 산울림은 7집 때까지, 서울 스튜디오와 마장동 스튜디오에서 녹음작업을 했다.

81년부터 김창완은 KBS 제3라디오 '11팝스' DJ로 나섰다. 당시 솔로로 대학에 공연하러 다니던 김창완에게 운동권 풍물패들이 꽹과리 치고 전원도 빼놓는 훼방을 받기도 했다. ‘회상’, ‘내게 사랑은 너무 써’ 같은 나긋나긋한 발라드가 들어 있는 8집은 대히트를 기록했지만 대중의 취향을 너무 의식한 앨범이었다. 그래서 9집 때 본래의 음악성을 되살리며 의욕적인 작업을 했다. 반응은 미미했지만 산울림 스스로는 가장 아끼는 앨범이다. 10집은 초창기 산울림 사운드를 구사한, 공식 활동을 접는 사실상 마지막 음반이었다. 김창완은 "산울림은 돈벌이가 안 됐어요. 공연 횟수도 적고 개런티도 비싸지 않았고요. 업소에도 안 섰으니까요. 그때는 업소에 서면 사람이 다 망가지는 줄 알았어요. 사실 그렇지도 않은데."

83년, 김창완은 첫 독집 <기타가 있는 수필>을 발표했다. 대성음반에서 록 그룹 로커스트와 형제 그룹 노고지리의 음반 프로듀서를 맡기도 했다. 또한 최성수, 윤설하, 임지훈, 현희, 신정숙, 허길자 등 유망 신인들을 모아 음악모임 '꾸러기'를 결성했다. 1985년 9월, 이들은 '꾸러기들의 굴뚝여행'이란 이름의 기획 공연을 대학로 파랑새극장에서 1백일 동안 열며 두 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김창완은 동물원의 음반에도 관여했다. "대성시절 프로듀서 하면서 곡도 써주었어요. 노고지리는 민요를 록으로 만든 데뷔 앨범을 발표했던 팀이었는데, 이흥주 사장의 제안으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꾸러기랑 동물원도 회사 일로 그냥 한 거예요." 산울림은 국악을 도입해 결합하려는 시도도 여러 번 했다. ‘땅강아지’, ‘청자’, ‘백자’, ‘떠나는 어린이’, ‘무녀’, ‘돌아오려무나’ 등. 이 중 ‘돌아오려무나‘가 제일 파격적이었다. 김창완은 개인적으로 동요집 세 장을 가장 마음에 들어 한다.

둘째 창훈은 해태상사를 거쳐 87년에는 해태 아메리카로 옮기며 LA로 이주, 한국 CJ의 미국법인인 CJ Foods에서 부사장과 카나다 [주] 앞선의 사장을 겸직하고 있다. 사업 중에도 음악의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그는 87년 LA에서 미국인 연주자들과 첫 솔로 앨범을 92년엔 솔로 앨범 <착각>을 발표하기도 했다. 막내 창익은 대우자동차에 입사한 후 현재 카나다 회사의 부사장을 재직하고 있다. 김창완은 90년대부터 연기자로 나서 영화 '정글 스토리'도 출연했고, 드라마 '은실이'에도 출연했다. 96년에는 산울림 전집 8장 CD 박스세트가 지구 레코드에서 발매되어 마니아들의 구미를 당기게 했다. 97년에는 삼 형제가 다시 모여 예전의 산울림으로 돌아가 13집 <무지개>를 발표해 팬들의 마음을 들뜨게도 했다.

99년에 김종서, 시나위, 윤도현밴드등이 참여해 헌정한 산울림 트리뷰트 앨범은 한국 록 역사상 산울림의 존재가 차지하는 의미를 읽게 해 준다. 산울림은 특정 장르에 얽매이지 않는 다양성과 솔직하고 파격적인 노랫말로 자신들만의 색깔을 견고하게 지키며 그룹 사운드 붐을 주도했다. 산울림은 신중현, 들국화와 함께 한국 록 역사의 삼대 봉우리로 평가 받고 있다.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03-11 17:56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