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앓던 제2의 김민기 민중가요의 혁명을 일구다

[추억의 LP 여행] 백창우(下)
시대를 앓던 제2의 김민기 민중가요의 혁명을 일구다

가수의 꿈은 없었지만 '재미있겠다' 싶어 이촌동 서울스튜디오에서 이틀 간 녹음을 했다. 당시는 중앙정보부의 요원이 검열을 하던 시절. 백창우의 모든 곡들은 조사 대상에 올랐다. 하지만 대학생도 아니고 위험 그룹에 소속되지도 않은 개인인지라 문제가 되는 곡의 가사는 수정하고 빼버리는 선에서 넘어 갔다. 당시는 가사 내용 중 새가 북쪽으로 가도, 슬퍼도, 비가 계속 와도 안 될 뿐더러, 더구나 붉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데뷔 음반 제작자인 지명길은 김민기 시대의 음악을 알았던 DJ출신. 그는 백창우를 '80년대식 제 2의 김민기'로 만들려 했다. 당시 언론들도 포크의 기대주로 보도했다.

가위질로 만신창이가 된 데뷔 음반을 받아 든 그는 기쁨보다 “귀 빼고 좆 뺀 당나귀 꼴”이라며 한탄했다. 음악이 정치, 사회와 깊은 연관을 가진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타이틀 곡 '바램'은 대학가에서는 '새 농민가'로 불렸다. 이화여대 체육대회 때 응원가로 처음 불렸던 이 곡은 대학가의 농활 운동가로 애창되었다.

백창우는 자신이 부를 수 없는 곡들을 일반 가수에게 주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노래는 임희숙의 재기 곡 '나 하나의 사람은 가고'와 강영숙의 '사랑'. 히트 넘버 작곡가로 이름이 나자 정애리, 혜은이, 김세화, 이동원 등 수 많은 가수들이 곡을 청해왔다. 그는 심의를 거치는 음반보다는 매니저를 맡은 구자룡과 종로 '무아' 등 서울과 지방의 음악실에서 간이 토크 콘서트 위주로 활동을 시작했다. DJ들과 교류하며 영미 음악이 아닌 3세계의 음악을 접했고 선배 오세은에겐 기타 주법을 배우고 곽성삼 등 포크 계열의 가수들과 교분을 쌓았다.

80년대 초반, 성남의 달동네에 교회를 연 곱사등이 전도사를 도와 여름 성경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그곳에서 문화 혜택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성가와 전래 동요를 가르치다 어린이 문화 모임 '굴렁쇠'와 동아리 '두레'를 결성했다. 그의 음반에 수록된 상당수 동요곡은 이 당시 만든 노래들. 빈민들을 위한 성남 시민회관의 '포크 콘서트82'는 고 김정호의 마지막 공식 무대이기도 했다. 김정호의 음악을 사랑했던 그는 추모 곡 '겨울새'를 작곡했다.

83년, 주변의 무명 가수들과 성남YMCA에서 4시간동안 통기타 공연을 열었다. 당시 참여했던 친구들과 노래패 '노래 마을'을 결성해 성남 중동의 술집거리의 신생 소극장에서 첫 공연을 열었다. 군사정권의 서슬을 피해 은유적인 노래, 구전 가요, 전래 동요 등을 주로 노래했다. 하지만 대학 무대에서는 사회성 강한 곡들을 마음껏 불렀다. '노래 마을'은 집단성만을 강조하는 민중가요에 반기를 들고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노래를 추구했던 노래 모임이었다. 노래마을 1집은 안기부 요원이 검열을 했다. 12곡 중 11곡이 심의에 걸려 '은자동아 금자동아'만 심의를 통과했다.

검열보다 더 높은 벽은 제작자의 상업적 기획이었다. 타이틀 곡을 고르는 데만 하루 종일을 싸웠다. 결국 합법적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음반을 만들 수 없음에 직접 프로덕션 '노래나무'를 만들어 노래마을 2집, 3집 그리고 독집 2집을 제작했다. 2집 '사람 하나를 만나고 싶다/1990년'은 곽성삼과 비 내리는 남한산성 근처 숲 속에서 만든 노래들. 하지만 제작사 대우음반이 망해 93년에 덕윤산업에서 1만장 한정으로 CD를 만들었지만 이곳에서도 단 한푼도 못 받고 마스터까지 빼앗겼다. 하지만 '노래마을'과 '노래를 찾는 사람들'은 민주화 열기를 타고 '민중가요의 대히트'라는 가요 혁명을 일궈 냈다.

90년대 초, 백창우는 고 김광석과 시와 음악을 결합하는 새로운 노래를 꿈꿨다. 김광석의 유작 노래인 '부치지 않은 편지'는 이때의 결과물. 하지만 갑작스런 김광석의 죽음으로 물거품이 되었고 두 번의 화재를 당하는 시련도 겪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백창우가 노름에 미쳐서 음악을 그만 두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당시는 영화 예술 채널 A&C 코오롱에서 '시처럼 노래처럼' 프로 진행을 하던 시절이었. 소문의 진원지가 지금껏 돌봐 주었던 노래마을의 스탭으로 밝혀지자 사람에 대한 환멸이 느껴졌다. 가끔 재미 삼아 했던 일을 빌미로, 자신에겐 한 마디 묻지도 않고 뒤에서 엉터리 사퓐?매도한 사람들이 섭섭해 1년 반 동안 세상을 훌쩍 떠나버렸다. 99년 초, 세상으로 돌아온 그는 기획사 '삽살개'를 만들어 전래동요 2개, 이원수 동요집 2개를 제작했다. 어느 날 홍대 앞 사무실에 '바위섬'의 가수 김원중이 찾아와 음반 프로듀서를 제안했다. 그는 모두가 자신을 매도 할 때, 유일하게 믿어 주었던 가수. '이등병의 편지'를 작곡한 김현성과 함께 김원중의 3집 음반 작업을 했다. 의기투합한 세 사람은 시-노래 동인 '나팔꽃' 결성의 발판을 마련했다.

99년 3월, 도종환, 김용택, 정호승, 안도현 시인이 합류해 '나팔꽃'은 마침내 태동했다. 6개월 후 '작게 낮게 느리게'라는 기치 아래 한양대 동문회관 대강당에서 첫 공연을 열고 2회 공연부터는 2003년까지 대학로 샘터 파랑새극장에서 매달 정기적으로 공연을 열었다. 금년부터는 대학로 소극장 정미소에서 철마다 공연을 펼치고 있다. 최근 나팔꽃 동인들과 국악 반주 음반을 발표한 백창우는 빚을 지고 되찾은 LP로 발매되었던 ‘노래마을 1-3집’ 마스터 작업을 완료해 CD 재발매는 물론, 11년 만에 세 번째 신보 작업에 몰두해 있다. 오랫동안 동요 작업에만 매달려 온 그는 이제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자기 본연의 포크 음악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는 자연 속에서 시냇물과 바람 소리와 더불어 연주한 음반을 내겠다는 소박한 꿈을 꾸고 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04-08 14:16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