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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되돌리기] 신설국
중년의 허무, 게이샤의 사랑

관객이 흔히 재미없다고 평하는 영화는 과장해서 말해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정말 못 만든 영화와 예술 영화이다. 물론 요즘에는 해외 영화제에서 작품성을 인정 받은 영화 중에서도 관객의 사랑을 받는 예술 영화가 적지 않다. 하지만 관객들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 희생’이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가 정말로 재미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예술 영화를 향한 관객들의 문화적 열등감과 지적 허영심이 어느 정도 예술 영화들의 생존을 가능케 한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예술영화인 듯, 뭔가 심오함이 있는 듯 작품성을 과장하는 영화들이 있다는 데 있다.

영화 ‘ 신설국’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 설국’의 현대판이라는 점을 내세우고 있는 영화이다. 자세히 따지고 들어가면 영화 신설국은 야스나리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사사쿠라 아키라가 리메이크한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신설국과 설국은 내용 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 설국’에는 세 명의 남녀가 등장한다. 인간의 애정은 한 벌의 지지미(삼으로 짠 옷감)보다도 오래가지 못가는 허무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쓸쓸한 중년남 시마무라, ‘ 때로는 차가운 박정(薄情)처럼, 한편으론 뜨거운 애정처럼’ 삶을 사랑하고 미워하는 적극적인 여인 고마코, ‘ 투명한 허상으로, 여릿한 저녁 어둠 속에서 빛나는 요염한 야광충’처럼 비현실적인 여인 요코. 소설은 삶의 진지함을 되찾기 위해 설국을 찾는 시마무라가 두 명의 여인을 만나며 풀어 내는 이야기를 그려 내고 있다. 이에 비해 ‘ 신설국’은 조금 밋밋한 맛을 보여준다. 영화(소설)는 사업이 망한 50대 중년남성 시바노가 죽음을 결심하고 사방이 눈으로 뒤덮인 마을 츠키오카를 찾아 오면서 시작한다. 이 곳에서 애인을 잃은 상실감으로 게이샤가 된 야생마같은 여인 모에코를 만나고 둘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주는 관계가 된다. 신설국은 설국에서 펼쳐지는 세 남녀의 농밀한 심리 묘사 대신 사랑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진부한 주제를 택했고, 그 빈곳을 잔인하리만치 하얗고 두텁게 쌓인 눈으로 채우고 있다.

물론 츠키오카의 눈은 단순한 배경은 아니다. 설국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비틀거리는 주인공들을 현실이 아닌 곳으로 유배시키는 공간이다. 위압적이면서 아찔한 눈은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말하듯 ‘ 이승에 한이 있어 매일 밤 찾아 오는 여귀가 뿜어내는 입김처럼’ 총천연색 현실을 모호하게 탈색시켜 버리는 안개와 같다. 눈에 뒤덮인 설국은 안개에 둘러싸인 무진인 셈이다.

하지만 신설국은 야스나리의 ‘ 설국’이나 김승옥의 ‘ 무진기행’이 이룬 문학적 성취를 영화적 작품성으로 되살리지 못하고 있다. 단지 남성의 성적 만족을 위해 일하는 게이샤와의 사랑이라는 에로틱한 설정을 통해, 풋풋한 20대의 여성과 사랑에 빠지고 싶어 하는 중년 남성들의 은밀한 성적 판타지를 채워 줄 뿐이다. 이것은 결국 위험하고 관능적인 사랑에 불과한 중년의 허무와 젊은 여인의 방황에 면죄부를 주려는 진부한 영화적 장치이다.

작품성은 기대에 못 미쳤지만 물론 이 영화에도 은근한 매력은 있다. 진정한 예술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이샤들의 모습은 심심한 영화 내용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이들은 남자들의 술시중을 들고 교태를 떠는 주부(酒婦)로서가 아니라 끊임없는 수련을 통해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정통 게이샤로서 확고한 직업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샤미센(세 개의 현으로 된 일본의 악기)가락에 맞춰 춤을 추는 게이샤들의 수줍은 자태. 이 영화의 진정한 작품성이 있다면 아마도 그들의 우아한 몸놀림에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선영 자유 기고가 startvedio@hotmail.com


입력시간 : 2004-05-13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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