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적 노랫말의 음유시인작곡가로 세상에 먼저 알려져

[추억의 LP 여행] 조동진(上)
서정적 노랫말의 음유시인
작곡가로 세상에 먼저 알려져


1980~90년대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의 대부였던 음유 시인 조동진. 과묵한 성격의 그는 저항적 이미지보단 세상을 관조하는 서정적인 노랫말로 세상과 교감하는 포크 가수이다. 그의 노래는 마치 계절의 낭만과 자연의 향내가 그윽한 풍경화 같았다. 60년대 중반, 미8군 록 밴드의 일원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한 그는 주류 무대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어 '가요계의 기인'으로 비쳐졌다. 비록 김민기, 한대수 등에 비해 적절한 평가를 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처럼 일관된 음악적 삶을 지켜온 아티스트는 드물다. ' 언더그라운드 가수'의 시대를 연 그의 히트곡 ' 행복한 사람', ' 나뭇잎 사이로', ' 겨울비, ' 작은배' 등은 언제 들어도 주옥 같은 곡들이다.

김지미, 정승호가 주연한 ' 육체의 길'을 만든 영화 감독 조긍하씨를 부친으로 둔 조동진은 1947년 9월 3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영화 제작에까지 손을 댄 부친의 사업 실패로 그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못했다. 진공관 앰프를 자작했을 만큼 오디오광이었던 큰 형 조동완은 음악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기타리스트 이병우와 함께 남성 듀오 ' 어떤 날'의 리더로 활약했던 조동익은 그의 동생이다. 어린 시절 그는 그림을 좋아해 화가의 꿈을 키웠다. 한국 전쟁 때 대구로 피난을 떠났다가 서울로 돌아와 방산초등학교에 다녔다. 이정선은 초등학교 후배. 이후 윤형주와 함께 대광중학을 다녔다. 대광고에 진학했을 때 아버지의 사업 부진으로 화가의 꿈을 접고 아르바이트로 음악을 시작했다. 대광고는 많은 가수들이 다녔던 학교. ' 따로 또 같이'의 이주원은 고등학교 1년 후배이고 최헌, 장계현도 동문들.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록 밴드를 결성, 음악회 행사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비틀즈 음악에 매료되었던 당시 쉽고 편안한 성가 같은 팝송을 주 레퍼토리로 삼았다. 하지만 밥 딜런, 피터 폴 & 매리, 레너드 코헨, 비지스 등의 포크 음악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음악에 빠지기 시작한 당시 종로나 명동의 음악감상실에서 음악 친구들을 사귀었다. 당시 그의 집에는 LP음반이 많아 당시의 다양한 팝송을 접했다. 1966년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2년 만에 중퇴를 하고 친구들과 동두천등 미8군 무대에 섰다. 하지만 친구들은 대부분 중간에 그만 두었다. 미 8군 무대 생활을 거친 후 명동 ' 미도파 살롱', ' OB'S 캐빈' 등 생음악 무대에서 록 그룹 쉐그린의 창단 멤버로 베이스기타를 연주했다. 노래 창작을 하기 위해 그룹 활동도 그만 두었다. 하지만 남 앞에 나서길 싫어했던 그는 음악 자체에만 집착할 뿐, 음반 발표나 방송 활동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1968년 처음으로 ' 마지막 노래’(나중에 심의에 걸려 '다시 부르는 노래'로 개명)를 작곡했다. 이 노래는 양희은, 현경과 영애, 서유석, 이장희등 많은 가수들에 의해 불리어진 포크의 명곡이다.

연대 앞 비잔티움 다방에서 이장희를 알게 되고 그를 통해 중학교 동창 윤형주도 만났고 투 코리안스의 김도향도 알게 되었다. 다른 가수들은 세시봉, 디쉐네, 내쉬빌 같은 곳에 모여 있었지만 조동진은 지정된 곳에서 노래를 하지는 않았고 연대 앞 부근의 다방이나 카페에서 주로 노래를 했다. 당시 자작 곡을 몇 곡 만들기는 했지만 주 레퍼토리는 '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 같은 팝 계열이었다. " 고등학교 때부터 습작으로 곡을 만들기 시작했지만 비잔티움에서 노래할 때부터 뭔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1969년 친구 집에서 경영하던 정릉의 청수장에서 시인 고은을 만났다. 공전의 히트곡인 두 번 째 곡 ' 작은 배'를 이 때 작곡했다. 그 인연으로 고은이 고정 출연했던 CBS의 PD 김진성을 알게 되었다. 이 시기에 조동진은 김민기를 비롯해 다른 음악 친구들과도 교류를 가졌다. 71년 포크 가수로 전향한 조동진은 기타 하나로 록 그룹들의 레퍼토리를 소화해 내면서 ' 1인의 그룹 사운드'로 불렸다.

대중에게 그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가수로서는 아니었다. 73년에 발매된 양희은의 <고운 노래모음 3집>에 수록된 ‘ 작은 배’의 작곡자로 먼저 세상에 등장했다. 쉽고 단순한 멜로디이지만 깊은 의미를 담은 노랫말의 매력으로 대학가와 다운타운을 중심으로 애청되었다. " 어울리는 성격이 아니라 많이 가지는 못했지만 명동 YWCA 청개구리 같은 곳에서 친구들이 제 노래를 많이 부르면서 퍼졌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가수보다는 몇몇 가수들한테 곡을 써 주면서 마장동 스튜디오에서 음반 녹음 때 세션을 맡게 되었다. 그는 나형구사장의 오리엔트 프로덕션의 스튜디오 세션 밴드 '동방의 빛'에서 세컨 기타를 맡았다.

핑크 플로이드 등 실험적인 프로그레시브 록에 심취했던 당시 멤버는 강근식, 조원익, 이호준, 유영수, 이영림 등 쟁쟁한 멤버들. 데뷔 음반에 수록된 곡들 거의 대부분은 이 시절에 만들어 졌다. 당시 그가 작곡해 히트한 곡들은 김세환의 ‘ 그림자 따라’, 최헌과 투 코리언스의 ‘ 들리지 않네’, 윤형주의 ‘ 작은 불 밝히고’ 등등. 그는 연주보다는 작곡에 더욱 관심을 두게 되었다. 하지만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던 그는 1973년경에 팀에서 빠져 나와 군 입대를 했다. 이후 74년 세 살 아래 김남희씨와 결혼을 해, 그는 가정을 꾸렸다.

입력시간 : 2004-07-14 15:56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