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비춰진 아버지의 세계

[영화되돌리기] 빅 피쉬
아들에게 비춰진 아버지의 세계

‘어느 날 아침 잠자던 그레고르는 뒤숭숭한 꿈자리에서 깨어나자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프란츠 카프카는 인간의 무의미하고 보잘것없는 실존을 한 마리의 벌레로 표현했다. 이것이 일종의 메타포임을 우리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마술적 리얼리즘의 작가로 알려진 마르케스는 달랐다. 카프카의 변신을 읽은 후 그를 괴롭힌 한 가지 생각은 그레고르가 변한 벌레가 어떤 부류의 동물이었을까 하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덧붙인다. 우리가 성경 속에서 실제로 말을 하는 발람의 노새나 대성당 위에서 소나기 위에서 오줌을 누었다는 가르간투아의 이야기를 믿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눈이 이성주의라는 어둠으로 가려졌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마르케스 만큼이나 우리도 황당하고 탈일상적인 에피소드가 합리적이고 일상적인 삶에 침투하기를 끊임없이 갈구한다. 3편까지 나온 해리포터 시리즈가 여전히 관객에게 매력적인 판타지인 걸 보더라도 때론 초현실이 현실을 압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믿을 수 있는 것보다 더 각광 받는 시대. 환상이 현실로 실현되는 놀라운 과학의 시대에 해리포터와는 다른 재미를 선사하는‘판타스틱’한 영화가 한 편 있다. 마법사가 그려내는 환상의 세계가 아니라 범인(凡人)이 만들어 내는 신화의 세계가 담긴 영화, 바로 기괴한 상상력의 소유자 팀버튼의 ‘빅피쉬’이다.

2003년 팀 버튼이 내놓은 빅 피시는 지금까지 내놓은 그의 전작들과 달리 덜 기괴하고 더 유아적이다.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가 된 그에게 이러한 변화는 당연한 것일까? 영화는 언제나 얼토당토 않는 황당한 무용담만을 늘어놓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가 못마땅한 아들의 이야기이다.

아버지가 말하는 황당한 이야기는 대개 경험의 극단적인 과장이다. 엄청나게 큰 물고기, 무서운 식욕을 자랑하는 거인, 마녀들의 동화 같은 마을, 전쟁터에서의 기막힌 영웅담 등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기억들을 내 논에 물대는 듯 윤색하는 식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정말 사실이라면? 아버지의 기억을 더듬어 나가던 윌은 아버지의 말을 입증해주는 증거들을 만나게 된다. 환상의 세계를 이성의 잣대로 보는 주인공은 육안으로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아버지의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왜 꼭 눈으로 봐야 믿는가? 카프카가 벌레를 이야기 했을 때 당장 눈 앞에 그때 그 벌레가 없으면 믿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성주의자의 속 좁은 이해심인가? 또 눈으로 확인한 것은 전적으로 사실인가? 지독한 상상력이 빚어낸 신기루는 아니었을까? 그래,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한 그가 심적 동요를 일으키면서 겪게 되는 일종의 착시현상 정도라고 보자. 아버지의 신화를 재구성하면서 아버지가 만든 상상의 세계에 그제서야 한 걸음 들어가게 된 주인공. 현실과 환상의 끊임없는 접점이 일상 속에 잠재해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만약 꿈이 깨어있는 삶에 대한 해설이라면 마찬가지로 깨어 있는 삶은 꿈에 대한 해석이다’라고. 꿈과 환상의 세계가 실재하는지 일상의 현실이 실재하는지 사실 알 수 없다. 이 두 가지의 세계는 인간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병치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는 환상이 현실을 압도한다. 무료한 삶을 사는 인간이 언제나 기막히게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환상에 압도당하길 절실하게 원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아버지의 삶을 인정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현실 너머의 세상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그의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정선영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4-07-20 17:03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