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같은 시대에 불같은 사랑

[영화되돌리기] 닥터 지바고
얼음같은 시대에 불같은 사랑

지난해 5월.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그에서 화려한 행사가 있었다. 도시 건립 30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축제를 연 것인데 이 자리에 상트 페테르부르그 출신의 푸틴 대통령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러시아의 수도 천거론이 제기되면서 뜨고 있는 도시 상트 페테르부르그.

표트르 대제가 서유럽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수도를 이 곳으로 옮긴 이후 볼세비키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린 레닌은 역사의 정통성을 이유로 모스크바로 수도를 옮겼다. 그런데 최근 푸틴 대통령을 포함해 상트 페테르부르그 출신들이 정계의 실세로 떠오르면서 천거론이 또다시 탄력받고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그는 황량하고 스산한 도시 시베리아와 음울하고 어두운 도시 모스크바와는 다른 이미지를 갖고 있는 곳이다. 베르사유궁 같은 여름궁전, 푸쉬킨과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 등, 푸른 네바 강가에 세워진 하얀 물의 도시인 이 곳을 상징하는 것들은 모두 예술적이다. 그래서인지 겨울궁전의 장엄함을 고스란히 그려낸 영화 안나 카레리나나 제정 러시아 시대를 이야기 하고 있는 영화 ‘전쟁과 사랑’과 같이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대부분은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정취를 담아낸다.

하지만 이 곳이 아름다운 예술의 도시만은 아니다. 피의 일요일과 10월 혁명 등 굵직한 사건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 바로 이곳 상트 페테르부르그였다. 이 때문에 예술과 혁명의 이질감이 화학작용을 하는 이 곳의 분신같은 이야기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영화 ‘닥터 지바고’(이 영화도 상트 페테르부르그를 배경으로 찍었다)일 것이다. 특히나 지독한 혁명의 시대를 견뎌 내야 하는 의사이자 시인인 주인공 지바고는 예술의 공간이 혁명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상트 페테르부르그 도시의 운명과도 같다.

혁명과 로맨스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영화 ‘닥터 지바고’는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을 전후로 의사이자 시인인 유리 지바고의 비극적 삶과 사랑을 그려내고 있다. 유리가 사랑한 여인 라라는 후에 붉은 군대의 지도자로 명성을 떨치는 과격한 혁명가 파샤와 교활한 사업가이자 현실주의자인 코마로프스키와도 염문을 뿌리는 인물이다. 파샤와는 결혼을 했지만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지고 난 후 1차 세계대전 때 운명적으로 유리와 만난다. 소풍과도 같은 짧은 사랑을 나눈 이 들은 볼세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혁명에 가담하길 거부하는 유리는 부르주아적인 시를 쓴다는 이유로 탄압 받고 결국 모스크바 인근의 시골도시로 이주한다.

그 곳에서 재회한 유리와 라라. 혁명과도 같은 사랑에 빠진 이들은 그들 앞에 어떤 운명이 펼쳐질지 아직 알지 못한다. 결국 사랑을 내놓고 가슴을 쥐어짜며 길에서 쓰러져야 하는 유리의 지독한 사랑이야기와 사랑을 보내고 홀로 그의 아이를 품어야 했던 라라의 고약한 운명이야기는 예견대로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재정 러시아 시대의 낭만과 광포한 혁명의 쓰라린 그림자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 상트 페테르부르그. 귀족들의 살롱 문화와 노동자의 거리시위가 공존하는 이 곳에서 영화 ‘닥터 지바고’는 비극적 사랑과 잔인한 혁명이 역설적으로 공존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피의 일요일에 죽어간 노동자의 피를 기억하지 않는 상트 페테르부르그와 숨이 끊어질 듯한 가슴앓이 없는 유리와 라라의 사랑을 결코 생각할 수 없을 테니까.

정선영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4-07-28 13:33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