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같았던 시련의 나날도 그녀의 끼를 잠재우지 못했다

[추억의 LP 여행] 임희숙(下)
운명같았던 시련의 나날도
그녀의 끼를 잠재우지 못했다


두 번째 결혼도 많은 갈등을 안고 있었던 것. 더구나 1975년 가요정화운동이라는 명분의 대마초 파동에도 휘말렸다. 이처럼 이혼, 대마초 사건, 음독 자살 시도 등 개인사의 고난이 한꺼번에 밀려든 이 시기는 그녀의 표현대로 가혹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세상을 알게 된 것은 인간적으로 ‘철이 든 계기’이기도 했다. “사람이 모질지 못했죠. 워낙 운명이 거칠기도 했지만, 돌아 보면 나 자신이 똑똑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 같아요”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해금이 되자 재기 곡 ‘돌아와 주오’를 발표했지만 예전과 같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래서 무리하게 출연한 81년 10월의 TV 공개 방송 ‘명랑 운동회’는 또 다른 불행의 씨앗이었다. 여자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과격한 게임으로 허리를 다치는 불의의 사고를 당했던 것. 척추 디스크는 3년 4개월 동안 활동 중단이라는 좌절의 시간을 또 다시 안겨 주었다. 그러나 그냥 주저앉지는 않았다.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이때부터 연예인 교회에 나가 신앙 생활에도 전념하며 재즈 피아노를 익혔다. 삶에 진지해진 그녀는 사랑 노래보다는 영혼을 노래하는 솔과 가스펠을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척추 디스크에 이어 왼쪽 다리에도 마비가 오자, 무려 180개의 금침을 몸에 넣는 시술을 했다. 효과를 보았다.

84년 5월, 몸을 추스르고 재기 곡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를 발표했다. 작사자 지명길을 통해 받은 가사를 읽어 본 임희숙은 ‘삶의 무게여’라는 부분에 반했다. 이 노래는 길고 어두운 터널과도 같은 시련기를 딛고 일어서는 부활의 노래가 되었다. 강렬하면서도 정적인 목소리는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삶의 향내가 배여 나왔다. 큰 반응이 있자 신세계레코드와 3년 계약을 이루어졌고 ‘한국의 티나 터너’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작곡가는 시인이자 노래 운동가로, ‘제2의 김민기’라고도 불렸던 백창우(현재 시노래 동인 나팔꽃의 리더). 서적 외판원으로 고단한 삶을 살아가던 백창우가 27세 때 만든 노래였다. 시인의 고단한 삶과 그녀의 아픈 과거가 호소력 짙은 보컬과 어우러지면서 빅히트가 터졌다. 2003년 12월, 시전문 문예계간지 ‘시인세계’가 국내 유명시인 1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이 노래는 전체 순위 8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임희숙은 “음반이 나온 뒤 2년 후에야 작곡가 백창우를 직접 만났다”고 한다.

85년 오준영의 곡을 받아 골든 2집 ‘상처’를 발표하며 이번에는 트롯가수로도 변신에 성공했다. 86년엔 지명길 곡 ‘사랑의 굴레’를 히트시킨 골든 3집 음반도 연속으로 발표했다. 활발한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리틀렌젤스 회관에서 열렸던 대한민국 제 1회 Jazz Festival 공연에도 참가했다. 또한 한때 연극 영화를 전공했던 그녀는 86년 KBS1 TV 드라마 ‘노다지’, 87년 영화‘토요일은 밤이 없다(송영수 감독)’ 등에서 주제가를 부르며 특별 출연을 했다. 89년엔 KBS TV드라마 ‘사랑의 굴레’의 주제가로 인기를 얻고, 그 해 10월 26일 대방동 해군해관에서 선배 재즈 가수 박대식과 재혼을 했다. 91년 6월엔 재즈가수 김준의 록 트로트 곡 ‘머물수 없는 사랑’을 발표했다. 자신의 아픈 사랑과 이별의 사연을 담은 이 노래는 제법 성공을 거뒀다. 11월엔 동경 재일 한국인 음성 나환자촌 위문 공연을 갖기도 했다. 94년엔 KBS 2TV 드라마 ‘남자는 외로워’에서 기지촌 가수로 출연해 만만치 않은 연기 실력을 뽐냈다.

재즈 가수로 변신한 그녀는 95년 1월 김준, 정훈희, 이동원과 함께 KBS 빅쇼에 출연해 절묘한 4색화음을 선보이기도 했다. 6월에는 KBS 2TV ‘밤에 음악사이’에 출연, 굴곡 많았던 자신의 노래인생 40년을 되돌아보는 뜻 깊은 시간을 가졌다. 친동생인 영화감독 이민용의 감독 데뷔작 ‘개 같은 날의 오후’에서는 출연료를 받지 않고 콩국수집 식당 주인 포항댁으로 출연을 했다. 당초 출연하기로 했던 김을동이 시의회 선거에 출마하는 바람에 이루어진 첫 주연급의 영화 데뷔였다. 영화의 성공으로 96년 1월 SBS TV 가족드라마 ‘엄마는 못말려’에도 출연을 했다.

그 해 3월,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메이플’이라는 고가구점과 카페를 겸한 공간을 오픈해 사업가로 변신했다. 음악은 중단하지 않았다. 그 해 6월, 과천 시민회관에서 재즈콘서트를 개최하고 11월에는 동생이 감독한 영화 ‘인샬라’에서 사하라사막 현지로케에 동행했다. 밥짓기는 물론 짐꾼 등 온갖 험한 일을 맡아 돈독한 남매 사랑을 과시했다. 99년 9월, 후배 장욱조의 도움으로 첫 CCM음반 ‘마음으로 사랑으로 영으로’를 발표했다. 2001년에는 셉씁??린鰥【?독일의 재즈 캄보 살타첼로와 협연한 것을 비롯, 뮤지컬 ‘블루 사이공’과 ‘겨울 나그네’에 출연 하는 등 폭 넓은 활동을 이어 갔다. 또 2002년에는 병마에 쓰러진 선배 솔 가수 박인수를 돕자는 콘서트를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미담을 남기기도 했다.

“왕년의 히트 가수가 아니라 그냥 곁에 있는 가수로 팬들에게 기억되고 싶다”는 그는 대중적 인기보다는 음악으로 오랜 생명력을 지켜오는 흔치 않은 가수다. 그에게 음악은 인기에 영합한 일회성 열기가 아니라 인생을 호흡하게 하는 삶의 전부이다. “과거를 돌아보면 스스로 대견함을 느낄 때도 있어요. 많은 고통 속에서 일어나 이렇게 노래를 부르고 있고, 아직도 저의 노래를 사랑해 주는 분들이 있으니 저는 복도 많고 행복한 여자 같아요.”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08-04 15:18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