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루이 암스트롱부산의 명물서 전국구 스타로

[추억의 LP 여행] 김상국(上)
한국의 루이 암스트롱
부산의 명물서 전국구 스타로


60-70년대 연예계의 ‘악동’으로 불린 가수 겸 영화배우 김상국. 진한 허스키 보컬로 ‘불나비’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 ‘쾌지나 칭칭나네’ ‘송아지’등 재즈에서 민요, 동요까지 폭 넓은 레퍼토리를 놀라운 호소력으로 소화했던 그는 한국의 루이 암스트롱이었다. 가슴을 파고드는 울부짖는 듯 했던 그의 노래와 세상 근심을 날려버리듯 대중의 마음을 휘어잡았던 코믹은 ‘코미디언을 웃기는 가수’‘쇼 무대의 명물’이라 불리게 했다. 그는 뜨거운 열정과 톡톡 튀는 개성으로 대중에게 강한 이미지로 어필했던 ‘괴물 엔터테이너’였다.

1934년 1월 24일 부산 범일동에서 태어난 그는 몸은 왜소했지만 총명했다. 어린시절 그의 보물 1호는 일본군인이 쓰던 찌그러진 신호나팔 악기. 어른들도 놀랠 정도로 나팔을 멋지게 불렀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 생겼다. 그래서 10여명의 동네 개구쟁이들과 모여 ‘만주로 달아나자’는 엉뚱한 모의를 하고 잡혔을 때를 위해 일본 헌병을 칼로 찔러 죽이는 연습까지 했을 정도.

경남중학에 입학하던 해에 지나가는 소달구지에 몸을 싣고 어른들이 부르는 도라지타령에 장단을 맞추며 신나게 태극기를 흔들며 해방을 맞았다. 경남중학 밴드부에 들어간 그는 드럼, 트럼펫, 알토 색스폰 등 다양한 악기를 접했다. 끼가 많았던 그는 기계체조와 연극에 관심이 많았다. 공부도 곧 잘 했고 특히 영어성적이 뛰어났었다. 중학 4학년 때인 16살 때, 6.26전쟁이 터졌다. 당시 부산 범일동 그의 집 앞 사거리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탱크를 앞세운 미군들의 행군 대열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다녔다. 어느 날, 친구들과 거리에 나가 구경을 하던 중 미군 탱크가 김상국 앞에 멈춰서 길을 물어왔다. 영어에 소질이 있었던 그는 주저 없이 영어로 대답했다. 그런 그가 귀여웠던지 미군은 그를 탱크에 싣고 미군부대로 데려갔다. 곧바로 미군부대 나이트클럽으로 인계된 그는 소년병 역할을 하게 되었다. 유난히 키가 작았던 그는 ‘찌코’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미군들의 마스코트가 되었을 만큼 귀염을 받았다. 특히 클럽장 윌리엄 대위는 그를 친자식처럼 아껴주었다. 이때 그는 외국의 재즈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정식 군인이 되고 싶어 헌병7기에 원서를 냈지만 탈락했다. 키가 작아서 떨어졌던지라 홧김에 육해공군 모두 찾아 다녔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그래서 친아버지 같았던 윌리엄 미 대위의 주선으로 진해의 미 K-10공군기지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를 아껴주었던 윌리엄 대위의 전사 소식을 접한 후 부대생활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학교에 복학했지만 학교 공부보다는 클럽에서 즐겨 들었던 재즈음악이 생각나 레코드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부산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또다시 미군부대에 들어가 미 군사 고문단의 통신실, 사병침실을 청소하고 사령관실의 하우스 키퍼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이때 한달 수입은 대기업 봉급의 2배가 넘는 1백 달러나 될 정도로 그는 풍족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온통 머리 속에 자리 잡은 음악 때문에 방황을 일삼던 그는 휴학을 밥 먹듯 했다. 휴학을 할 때마다 댄스 홀에 나가 트럼펫을 연주했다. 연주자로 제법 인기를 끌면서 스타의 꿈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9년 만에 겨우 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부산지역 어디서 건 ‘음악 콩쿨이 열린다’는 소식이 들리면 만사 제쳐놓고 참가해 점차 콩쿨대회의 명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부산 MBC에선 공개방송을 열 때 마다 이 명물을 잊지 않고 불러냈다. 그는 미군부대에서 배운 재즈로 제법 인기가수 행세를 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물밀 듯이 밀어닥친 외국음악의 영향으로 소울, 흑인 영가 등 흑인 노래 붐이 일어났다. 일반무대에 선 그는 루이 암스트롱의 걸쭉한 창법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특이한 창법 뿐 아니라 무대에서는 괴상한 몸짓과 쇼맨십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그의 무대를 본 사람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부산을 중심으로 경상도 일대에서 김상국의 이름 석자는 제법 유명해졌다. 작은 외모핸디캡을 뛰어넘으려 부단히 연구하고 노력한 결과였다.

제법 유명세를 타면서 부산의 큰 나이트클럽 ‘백조’에서 출연섭외가 들어왔다. 유명 가수들의 십분의 일이었던 하루 2백원의 개런티를 받는 3류 가수 대접을 받았지만 그는 정식 가수가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이미 27세를 넘기고 있었다. ‘국제쇼’의 정식단원이 된 그는 대구로 첫 원정공연에 나섰다. 하지만 공연이 흥행부진을 면치 못해 여관비 조차 내지 못하게 되자 한 쇼 단은 그를 볼모로 잡혀놓고 줄행랑을 쳐버렸다. 알거지가 되어 부산으로 돌아온 그는 30살이 되어서야 서울무대로 진출을 시도했다.

서울 상경 후 ‘다이어먼드 쇼’‘서울쇼’등 밤무대에서 인기를 얻어갔다. 그러던 중 꿈에서나 그렸던 시민회관 무대에 서게 되었다. 당대의 인기가수 남석훈과의 조인트 공연이었다. 시민회관 간판에는 ‘부산서 온 괴물가수 김상국과 최고 인기가수 남석훈의 대결’이란 타이틀이 대문짝만 하게 내걸렸다. 무려 2개월에 걸친 장기공연은 대성공이었다. 공연의 성공은 드디어 음반발표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65년 그는 작곡가 김인배로 부터 공식 데뷔 곡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와 ‘쾌지나 칭칭나네’를 받아 발표했다. 수록된 5곡 중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는 라디오 인기가요 톱을 장식했을 정도 엄청난 반응을 몰고 왔다. 당대 최고의 가수 최희준과 스플릿 음반(오아시스)으로 꾸며진 이 음반에 이어 ‘불량소녀 장미’, ‘여자가 웃을 때’등으로 히트 퍼레이드를 벌였다. 66년‘껌 씹는 아가씨’가 금지곡으로 묶이는 아픔도 있었지만 인기가수로 떠오른 그에게 영화출연 교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입력시간 : 2004-08-11 16:11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