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처럼 스러지는 삶, 그 무게 재기

[영화되돌리기] 스모크
연기처럼 스러지는 삶, 그 무게 재기

현대 스냅사진 예술의 거장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지난 2일 타계했다. 브레송은 1952년 사진집 ‘결정적 순간’을 출간하면서 세계적인 사진가로 명성을 얻는다. 그가 말하는 ‘결정적 순간’이란 순간의 예술인 사진이 포착하는 최상의 찰나를 의미한다. 덧없이 사라지는 한 순간을 영원으로 담아내는 사진. 이처럼 시간과 기억을 화석화시키는 매력을 갖고 있는 사진은 영화 ‘스모크’의 주요한 소재이다.

영화 ‘스모크’는 담배연기의 무게가 얼마나 될까 하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이자 극중 소설가인 폴 벤자민은 담배의 무게에서 담뱃재의 무게를 덜면 그것이 곧 연기의 무게라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고정시킬 수 없는 연기의 무게를 재는 일. 이것은 바로 연기처럼 덧없이 허공으로 스러지는 순간을 렌즈에 포착해서 물화시키는 사진과도 같다.

담배가게 주인 오기랜은 매일매일 의미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사진에 담아내는 일을 취미로 삼는 인물이다. 오전 8시 브룩클린 거리. 그는 같은 시간 같은 거리를 무려 12년간 같은 프레임 속에 담아냈다. ‘다 똑같은 사진이잖아’라고 퉁명스레 말하는 폴에게 그는 섬세한 차이를 설명한다. 그 순간 폴은 사진 속에서 총기사고로 죽은 부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라도 그 삶의 시간이 김씨의 것일 때, 박씨의 것일 때, 혹은 폴의 것일 때 삶의 실재성이 새삼 다르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사진의 위력에 압도당한 벤자민 폴. 그는 영화 속에서 소설가이다. 영화의 원작이 폴 오스터의 소설 ‘오기랜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인 것을 감안하면 폴이 폴 오스터의 분심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폴은 쉴새없이 사진을 찍어대는 오기랜처럼 연기처럼 두서없이 흩어지는 일상의 에피소드들을 씨줄과 날줄을 엮어 소설이라는 형태로 물화시키는 인물이다. 이처럼 ‘스모크’가 갖는 일상성의 문제는 영화의 중요한 코드가 된다.

또한 실체를 흐릿하게 만드는 연기의 불투명함은 영화의 모든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주제가 되기도 한다. 친아버지를 찾아 나섰다가 폴의 집에 머물게 되는 토마스 콜, 오기랜의 옛 애인 루시, 루시의 마약중독자 딸 펠리시티는 각기 다른 에피소드의 주인공이다. 이들은 때론 의도적으로 진실을 감추거나 때로는 자신마저 알 듯 모를 듯한 실체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원래 인간사의 소소한 일들이 어찌보면 맞는 것도 같고 틀린 것도 같듯이 참과 거짓이 두부 모 잘리듯 반듯하게 갈릴 리 없다.

그런데 얄궂게도 때로는 거짓 속에서 진실이 발견되기도 한다. 꾸며낸 이야기(소설)가 삶의 진정성을 담아내듯이 말이다.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오기랜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허구를 통해 삶의 진실성을 드러내는 묘미를 보여주고 있다. 오기랜은 신문사로부터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청탁받은 폴 오스터에게 자신의 경험(사실은 허구인)을 들려준다. 자신이 사진을 찍기 시작하게 된 이유라며 들려준 오기랜의 이야기 속에는 앞 못 보는 할머니를 위해 가짜 손주노릇을 한 젊은 시절의 오기랜이 있다. 거짓이었지만 진짜보다 더욱 할머니를 행복하게 해준 오기랜. 나이키는 아니었지만 누군가의 유년시절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었을 나이스 운동화처럼 그는 잘 짜여진 거짓말로 허구의 위력을 보여준다.

사실과 환상을 절묘하게 뒤섞어 놓는 탁월한 글 솜씨로 유명한 폴 오스터. 이 영화에서도 그 모호한 경계를 넘나드는 폴 오스터의 매력을 확인해볼 수 있다. 주인공이 신경질적인 자세로 ‘톡톡’ 타자기를 치는 모습에서 그의 실루엣을 연상해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

정선영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4-09-01 16:10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