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천재 뮤지션의 예정된 삶못 다 피워낸 음악적 재능

[추억의 LP 여행] 장덕(下)
한 천재 뮤지션의 예정된 삶
못 다 피워낸 음악적 재능


솔로로 독립한 장현은 ‘잠 못드는 밤’‘만날 수 없는 밤’을 발표했고 장덕은 귀국 후에 작곡한 ‘님 떠난 후’ 를 발표했다. 화려하게 부활의 날개를 활짝 편 것은 동생 장덕. ‘님 떠난 후’는 KBS TV 가요 톱 텐에서 연속 5주 1위를 차지했고 MBC라디오 ‘금주의 인기가요’, PCI 뮤직 박스, 전국 DJ 연합회 차트 등 각종 인기 순위에서 정상에 등극했다. TV와 신문 등 주요언론의 대대적인 조명을 받게 된 장덕은 당시 급성장하고 있던 이선희, 정수라와 더불어 여성 트로이카 가수 체제를 구축했다. 이들은 치마보다는 바지를 즐겨 입어 ’바지 삼총사‘로 불렸다.

싱어 송 라이터였던 장덕은 이선희, 이은하, 양하영, 임병수 등에 곡을 주어 히트 넘버를 기록했다. 또한 자신의 앨범뿐 아니라 동료 가수들의 음반 제작에도 참여해 음악 프로듀서로도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특히 이은하가 불러 빅 히트했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은 조성모, 왁스, 신수경 등 많은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었던 그녀의 명곡이었다.

이 곡은 최근 TV드라마 ‘천생연분’에서 황신혜가 애절하게 불러 많은 시청자들의 가슴을 울렸다. 오빠 장현은 정상의 가수로 떠오른 동생의 체계적인 뒷받침을 위해 밤 무대 생활을 정리했다. 그래서 박혜성, 훈이와 슈퍼스타 등의 가수들을 영입해 음반 매니지먼트사 '코아기획'을 창립했다. 장덕은 팬 클럽 ‘코알라’를 만들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87년 6월 장덕은 석래명감독의 ‘아스팔트위에 동키호테’에 여대생 수지 역으로 주연배우로 픽업되고 골든 앨범도 발표했다. 87년 9월엔 한국대표로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제3회 ABU가요제에 출전했다.

1988년 4집 앨범에서는 댄스 풍의 김파 곡 ‘얘얘’와 김범룡 곡 ‘서울의 밤거리’를 발표해 특히 지방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사실 정상의 가수로 도약한 후 생겨난 주위의 시샘은 늘 부담스러웠다. 1989년 유작이 된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를 발표했지만 반응은 실망스러웠다. 또한 오빠 장현이 설암 판정을 받으며 쓰러졌다.

좌절 속에 음악활동을 접고 오빠 가족들을 돌보게 되면서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다시 우울증 증세가 도졌다. 90년 1월 21일 출연한 MBC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무대는 대중 앞에 나타난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장덕은 1990년 2월 4일 29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봉천동 자택에서 거행된 영결식은 가수분과위원회장으로 가수 이태원의 사회로 남궁옥분등 50여명의 동료 가수들의 오열 속에 진행되었다.

경찰은 “세 가지 약을 일시에 복용, 상승 작용에 의한 쇼크 사망”으로 최종 판명을 내렸다. 하지만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알려진 그녀의 죽음에 대해 충격과 더불어 ‘자살설’까지 나돌며 세간의 관심을 불거졌다. 이후 그녀의 유작 앨범은 자신의 운명을 예언한 것이라는 소문과 함께 호기심을 증폭시켰다. 이에 이선희는 3월에 장덕 추모시를 써 자기 시집에 수록했다.

90년 6월, 장덕의 추모앨범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가 발표되었다. 추모앨범에는 전영록, 위일청, 이선희, 임지훈, 김범룡, 지예, 박혜성, 최성수, 진미령, 양하영 등이 참여해 그가 작곡한 미발표 곡까지 담아 의의를 더 했다. 하지만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7개월 후 8월 16일. 시한부 인생을 살던 오빠 장현도 34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남매의 연이은 비극적 죽음을 접한 대중의 충격은 컸다. 이에 92년 3월, ‘현이와 덕이’ 유작 앨범이 발매되고 어머니 이숙희씨는 93년 1월 남매의 숨겨진 과거을 담은 감동적인 수기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를 출간했다.

김광석, 유재하, 김현식 등 많은 요절 가수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장덕에 대한 재평가가 전무하다는 사실은 안타깝다. 많은 곡들이 대중의 사랑을 받았건만 현재 그는 잊혀진 가수가 되었다. 동시대의 여자 가수들 중 이선희는 준 국민가수 급의 대접을 받으며 데뷔 20년 무대를 최근 세종문화회관에서 성황리에 치러냈다.

늘 비운의 가정사로 인해 우울했지만 TV 쇼 프로그램에 나와 송창식의 ‘참새와 허수아비’를 능청스레 부르는 배짱이 있었던 장덕. 그는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죽은 불행한 가수로만 기억되기에는 억울한 뛰어난 음악성의 뮤지션이었다. 열 여섯의 나이에 자작곡을 들고 국제 가요제에 출전해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지금까지도 리메이크의 대상이 되는 명곡을 작곡한 아티스트였건만 그녀에겐 늘 반짝 아이돌 가수의 이미지가 선명함은 왜 일까?

남매의 연이은 비극적 죽음이 준 충격이 강해서 일까? ‘현이와 덕이’는 비운의 가수로만 대중에게 회자되고 있다. 어린 나이에 맛 본 대중적 인기의 달콤함에 너무 연연한 탓일까? 고통을 딛고 자기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기 보단 팬들의 반응에 음악 활동의 가치 판단을 우선으로 둔 생전의 음악적 태도는 그래서 아쉬운 면이 없지 않다.

아이돌 가수의 이미지를 벗고 신비롭고 철학적 분위기의 여성 싱어 송 라이터로 변신을 하며 아티스트로 대접 받는 이상은의 경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보기 드문 여성 싱어 송 라이터로 주옥 같은 곡들을 남긴 그녀에 대한 대중 음악계의 재평가 작업은 너무 가혹하기만 하다. 그나마 금년 9월 얼굴 없는 여고생 가수로 유명한 ‘리브가’가 자신의 데뷔 앨범에 장덕의 ‘예정된 시간을 위해’를 리메이크한 ‘Leave-歌’를 발표한 것은 위안이 아닐 수 없다.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10-19 18:37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