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조와 운명같은 사랑'밤안개'걷히자 신데렐라로

[추억의 LP 여행] 현미(下)
이봉조와 운명같은 사랑
'밤안개'걷히자 신데렐라로


1962년 어느 날, 라디오를 끼고 살던 이봉조가 강렬한 멜로디에 애잔한 느낌을 주는 곡을 휴대용 전자 올갠으로 현미에게 연주해 주었다. 냇킹콜의 ‘ It's Lonesome Old Town'을 듣고 편곡한 곡이었다. 멜로디가 마음에 들었던 두 사람은 번갈아 한 소절 한 소절씩 노랫말을 붙여 나가 대표곡 ‘ 밤안개’를 완성했다.

얼마 후 미 8군 장교 클럽에 작곡가 손석우가 찾아와 데뷔음반 취입을 제안했다. 팝송이 아닌 자신의 곡을 부른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을 하고 이봉조악단의 반주로 ‘핑크 슈즈’, ‘나의 길을 가련다’ 등 6곡을 선곡해 녹음에 들어 갔다. 하지만 2곡이 더 필요해 일본에서 돌아온 길옥윤에게 ‘내 사랑아’를 받고 급한 마음에 이봉조가 막 편곡했던 ‘밤안개’를 추가했다. 첫 편곡 작품 취입이라 이봉조는 ‘밤안개’를 녹음할 때 “목소리가 크다, 작다”는 등 까다롭게 참견을 하며 녹음을 마쳤다.

녹음 후 현미는 한명숙 등과 함께 제주도 공연길에 올랐다. 하지만 공연비 사기 사건으로 2주일간 발이 묶었다. 그 사이 발매된 현미의 데뷔 음반 ‘밤안개’는 5만장이 넘게 팔려나가는 열풍을 일으켰다. 이 사실을 모른 채 간신히 서울로 돌아온 현미는 집으로 밀어닥친 기자들의 인터뷰 공세에 어안이 벙벙했다.

각 방송사 PD들과 프로덕션 사장, 업소 관계자들이 집으로 들이 닥쳤다. 하루 아침에 신데렐라가 된 현미는 조선호텔 나이트클럽의 프린세스룸과 특별 출연 계약을 맺고 아스토리아, 그랜드호텔 쇼에 겹치기 출연을 하게 되었다. 이봉조에겐 드라마 주제가 작곡 의뢰가 밀려 들었다. 첫 작품은 동아방송 라디오 주제가 ‘아빠 안녕’. 당시엔 ‘ 라디오 드라마 히트 = 영화 제작’이라는 공식이 성립되던 시기. ‘아빠 안녕’은 당연히 영화로 제작되었다.

이렇게 작곡 이봉조, 노래 현미 콤비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유명인사가 된 이봉조는 왕초로 불리며 한동안 현미를 위해서 곡을 만들었다. 현미는 1963년 신성일, 엄앵란과 함께 영화 ‘보고 싶은 얼굴’의 극장쇼 무대의 가수로 출연했다. 구성진 멜로디의 이 노래는 ‘밤안개’와 더불어 대표곡이 되었다. 이후 영화 ‘애인’, ‘떠날 때는 말없이’ 등 유독 슬픈 분위기의 노래로 히트 퍼레이드를 벌였다.

64년 여름, 우연하게도 스카라 극장 앞 목욕탕 2층 같은 녹음실에서 둘째를 임신한 만삭의 현미가 ‘떠날 때는 말없이’를, 8개월 만삭의 이미자가 ‘동백 아가씨’를 녹음했다. 두 사람 모두 대표곡과 연결된 이 같은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후 현미는 KBS TV ‘ 럭키 그랜드쇼’등에 고정 출연을 하고 토크 쇼 ‘현미와 저녁 한때’로 인기 가도를 달렸다.

발표 곡 중 평론가 이진섭이 만든 ‘세월은 가도’는 훗날 박인희에 의해 빅 히트가 되었다. 이봉조도 64년 동아방송 악단장을 거쳐 TBC TV의 악단장이 되었다. 야심차게 개국한 TBC는 현미를 비롯해 최희준, 남일해, 위키리, 유주용, 박형준, 한명숙 등 인기 가수들을 모두 전속 가수로 계약했다. 당시는 도박이 성행해 사회적인 물의가 빚던 시절. 이봉조도 카지노에 미쳐 재산을 탕진하면서 두 사람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70년대 초, 첫 월남 청룡무대 위문 공연때 장병으로 월남에 와있던 남진, 진송남과 만났다. 당시 ‘ 떠날 때는 말없이’는 장병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최고의 인기곡이었다. 파월 장병들 사이엔 “여자 속옷이 있으면 죽지 않는다”는 미신이 있었다. 그런 사연을 들은 현미는 팬티 수십 장을 사 가지고 떠나, 몰려드는 장병들에게 주었다. 그러다 보니, 막상 귀국을 앞 두고 입고 갈 팬티가 한 장도 남지 않았다. 그래서 ‘입던 팬티는 돌려 달라’며 방을 부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는 우량아인 둘째 아이때문에 김상국으로부터 ‘돼지 엄마’란 별명을 얻었던 때였다.

71년 7월, 10만명을 수용하는 올림픽경기장에서 열린 제 4회 그리스 국제 가요제에 참가했다. 참가 번호 9번으로 장미가 수놓인 흰색 한복을 입고 참가곡 ‘별’을 불러 베스트10에 입상했다. 73년 1월, 음악 생활을 결산하는 베스트 음반을 발매했다. 73년말 이봉조는 대한민국예술상 수상자로 결정되어 대통령표창과 훈장을 받았다.

74년 9월, 남진 등과 미국 위문 공연에 오른 이봉조. 19년 동안 부부로 살아오며 수 없이 ‘바람을 피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건만 여가수 K와 미국과 일본 밀월 여행까지 떠나자, 1974년 11월 28일 파경을 선언했다. 이후 무교동 월드컵에 출연, 홀로서기를 시작한 현미는 81년 1월 미국 레이건 대통령 취임기념 만찬 파티에서 ‘주기도문’을 불러 기립박수를 받았다.

현미와 이봉조는 전두환대통령 취임 기념쇼에서 화해를 하고 별거 10년만인 85년 KBS 2TV ‘나이트쇼’에 함께 출연했다. 부부 사이는 갈라졌지만 음악적 연결 고리는 유지했던 것. 하지만 87년 8월, 이봉조는 12곡의 유작을 현미에게 남기고 57세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91년 현미음악학원을 개원, 주부 노래 교실을 운영하고 이봉조의 음악 업적을 알리기 위해 BJ 음악 재단도 설립, 94년엔 추모 앨범으로 음반 제작상을 받기도 했다. 97년엔 자서전 ‘오늘을 마지막 날처럼’을 출간했다. 98년에는 한국전 때 헤어진 북쪽의 동생들과 중국 창춘에서 48년만의 상봉을 한 사연이 MBC TV에 다큐멘터리로 방송되어 화제가 되었다.

2000년 3월, 세실극장 소극장에서 ‘현미와의 화끈한 만남’ 콘서트도 열고 11월 제 34회 가수의 날 기념식에서는 공로 대상을 수상했다. 2001년 신보 ‘아내’를 발표한 66세의 현미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여전히 가요계의 여장부로 살아 가고 있다.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11-03 13:15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kschi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