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의 세상살이

[영화 되돌리기]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마이너리티의 세상살이

맨 온 파이어. 불타는 남자? 아니면 열 받은 남자?

외화가 개봉될 때마다 제목 작명이란 언제나 일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 맨 온 파이어’처럼 아예 원음을 적는 경우도 많다. ‘ 맨 온 파이어’는 그나마 쉬운 단어들이라 눈 감아 준다손 치더라도 ‘ 언스토퍼블’, ‘ 본 슈프리머시’에 이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도무지 제목만으로는 영화 내용을 점칠 수 없으니 말이다.

물론 제목을 우리나라 말로 무조건 바꾼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니다. 때로는 엉뚱하게 바꿔서 황당한 영화로 둔갑시키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영화 ‘ 고스트 월드’는 난데없이 ‘ 판타스틱 소녀 백서’로 바뀌어 영화와 무관한 성적 뉘앙스를 풍기게 됐고 아주 오래 전 영화 ‘ 잔다르크의 수난(La Passion de Jeanne D’Arc)’은 ‘ 잔다르크의 열정’으로 번역돼 생판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존 쿠삭이 주연한 영화 ‘ 하이 피델리티(High Fidelity)'도 번역 제목을 이상하게 단 까닭에 더욱 더 비디오 대여자의 환심을 끌지 못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번역 제목은 다름아닌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제목만 보면 그저 그런 로맨틱 코미디영화란 생각이 들지만 이 영화는 로맨스 영화의 통속성과는 거리가 멀다. 떫은 감처럼 꾸미지 않은 일상의 맛이랄까? 적어도 ‘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와 같은 제목에서 풍기는 얄궂은 합성 착색료 맛은 나지 않는다.

먼저 ‘ 하이 피델리티’라는 원제를 보자. 제목에는 원래 많은 내용을 함축하기 마련이다. ‘ 하이 피델리티’는 흔히 하이 파이(Hi – Fi)라고 불리는 오디오 용어이다. 라디오나 앰프 등에서 저음부와 고음부의 원음을 충실하게 재생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이 말 속에 영화 속 주인공들의 마니아적 취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주인공 롭 고든(존 쿠삭)은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는 노총각이고 그의 절친한 친구 배리와 닉 역시 음악에 미쳐서 살아가는 음악광들이다(스티비 원더 음반을 사겠다는 손님을 내쫓을 만큼 강직한 취향을 고수하는 배리 역은 영화 ‘스쿨 오브 락’에서 괴짜 음악선생으로 열연한 잭 블랙이 맡았다). 이들의 취미는 시도 때도 없이 Top 5를 만드는 일. 노래 제목과 순서까지 일일이 기억하고 있을 만큼 음악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이들에게 ‘ 하이 피델리티(고충실도)’란 취향의 완성과도 같다.

하지만 제목이 포섭하는 내용이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롭 고든은 현재 사귀던 여자 친구에게 뻥 차인 상황. 도무지 자기를 찰 이유를 못 찾은 롭은 지금껏 자기가 사귀었던 네 명의 여자 친구를 찾아 나선다. ‘ 왜 내개 이토록 여자에게 차여야만 하는가’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얻기 위해. 그리고 ‘ 충실도’에서 그 해답의 열쇠를 찾을 수 있었다.

30살 롭 고든. 그는 냉소적인 딜레탕트요 폐쇄적인 나르시스트이다. 인생에 무계획적인 한량이자 주류에서 한없이 빗겨간 마이너리티이다. 연애에는 실패자, 결혼에는 겁쟁이, 일에서는 무능력자, 인생에서는 방관자. 이토록 삶의 충실함이 떨어지는 그에게 어느 여자가 미래를 설계하려고 할 것인가? 주인공 롭에게는 음악에서 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고충실도가 필요한 법이라는 사실, 영화 제목은 이 두 가지를 모두 말해 주고 있다.

소수 마니아들의 취향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있는 영화 ‘ 하이 피델리티’. 음악을 좋아하고 우디 앨런식 장광설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좋아할 만한 영화이다. 하지만 말 많은 남자들의 지루한 수다가 거북하다면 영화 제목처럼 비디오 리콜 요청이라도 한 번 해볼까? 제목대로라면 사랑도 리콜이 되는 마당인데….

정선영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4-11-10 13:27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