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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12일 간의 명승부'
양 김 전쟁…드라마를 쓰다
재계 라이벌의 명감독 라이벌전, '위 아래'없던 팽팽한 신경전




김응용 감독
김재박 감독



2004 한국시리즈는 한국 프로 야구 사상 가장 오랫동안 벌어진 대접전으로 기억될 것이다. 7번의 경기에 이동일 이틀을 더 한다 해도, 아무리 길어야 9일 안에 승부가 났던 게 그 동안의 관례. 그러나 이번 한국시리즈(10월 21일~11월 1일)는 무려 3차례의 무승부덕에 사상 초유의 9차전까지 치르며 12일 동안이나 진행됐다.

하지만 이것은 드러난 숫자에 불과하다. 현대와 삼성의 한국시리즈는 정규시즌 종료를 하루 앞 둔 지난달 4일 이미 시작됐다고 보는 게 옳다.

선제 공격은 삼성 김응용 감독의 입에서 시작됐다. “ 기아가 현대의 정규 시즌 1위를 위해 경기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며 의혹을 제기한 것. 그러자 현대 김재박 감독도 가만 있지 않았다. “ 아직도 그런 식으로 야구하냐"며 대선배를 비꼰 것.

- 여우와 코끼리 양보없는 입씨름

김재박 감독은 지난 1996년 한국 시리즈에서 현대의 창단 사령탑으로, 당시 해태 김응용 감독과 맞붙었던 때를 결코 잊지 못했다. 현대는 4차전에서 정명원의 노 히트 노 런으로 2승 2패를 만든 뒤 느닷없이 튀어 나온 김응용 감독의 ‘특정 지역(인천) 심판의 편파 판정설'에 흔들렸다. 결국 4승 2패로 해태의 우승. 김재박 감독에겐 유일한 한국시리즈 패배였다. 이를 잊지 않은 김재박 감독도 ‘입씨름 신경전’에 적극 가세했다.

‘져 주기 공방'은 한국시리즈 시작을 앞 두고 ‘박종호 논쟁'으로 이어 졌다. 두산과의 플레이 오프에서 부상당한 삼성 박종호에 대해 김응용 감독이 “한국시리즈에 뛰기 어렵다”고 얘기하자 김재박 감독이 “뛸 수 있다. 연막 작전이다"라며 코끼리 감독의 속을 긁은 것. 김응용 감독은 “자꾸 연막 작전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방독면 쓰고 야구 해야겠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었다.

재계 라이벌 삼성과 현대가 맞붙은 사상 최초의 한국시리즈였던 데다, ‘명감독'이란 타이틀이 붙는 두 사령탑이 물불 안 가리고 신경전으로 가세했으니 흥미 만점이었다. 이번 한국시리즈는 그래서 시작전부터 ‘대박 조짐'이 보였다.

▲ 1차전 - 잘 댄 번트, 홈런이 부럽지 않다(현대 6-2 삼성)

현대는 예상대로 기회만 있으면 번트 작전을 펼쳤다. 6회말 두 차례의 번트 성공으로 안타 없이 1사2,3루 찬스를 만들자 잘 던지던 삼성 선발 배영수도 흔들렸다. 이후 안타 3개가 터지며 현대의 3득점. 반면 삼성은 7회 무사 1, 2루에서 김재걸의 번트 아웃, 박한이의 병살타로 허망하게 기회를 날렸다. 양준혁 로페즈의 홈런 2방이 쓸모없게 된 경기.

▲ 2차전 - 무승부 시리즈의 서막(현대 6-6 삼성)

한국시리즈 사상 4번째이자 첫 정규 이닝 시간 제한 무승부. 야구팬들이 4시간 11분의 혈투에 박수를 보내자, 양 팀 선수들이 무승부에 맛을 들인 듯. 이 후 2차례나 더 승부를 가리지 못한다.

4점차의 리드를 지키지 못해 동점을 허용한 삼성이나, 4점을 따라 붙어 8 - 8 동점을 만든 8회 1사 만루 찬스를 놓친 현대 모두 아쉬움에 땅을 쳤다.

▲ 3차전 - 요술(?) 부린 선동열 코치(삼성 8-3 현대)

2회까지 3점씩을 주고 받은 동기생 선발 투수 삼성 김진웅과 현대 김수경은 초반 컨디션이 똑 같이 좋지 않았다. 타격전을 예상했던 순간 삼성 선동열 코치가 마운드에 올라가 김진웅을 다독였고, 요술처럼 김진웅은 달라졌다. 선 코치가 강조한 것은 ‘ 완급 조절'. 빠른 볼을 기다렸다는 듯 안타를 때려 내던 현대 타자들은 투구 패턴을 바꾼 김진웅의 느린 변화구에 적응하지 못하고 헛방망이질을 해 댔다.

?4차전 - 배영수의 ‘10이닝 노히트노런’(삼성 0-0 현대)

이날 경기를 지켜 본 야구팬들은 적어도 입장료는 아깝지 않았을 듯. 한국 프로 야구에서 단 한 차례도 없었던 ‘10이닝 노 히트 노런’이 삼성 에이스 배영수의 어깨에서 만들어졌다. 현대 타자들은 8회 2사까지 단 한 명도 1루를 밟지 못하다, 박진만이 볼 넷을 골라내 간신히 ‘퍼펙트 게임’의 수모를 피했다. 작전을 좋아하는 김재박 감독도 꼼짝없이 팔짱만 끼고 있어야 했을 정도. 배영수의 날이었다.

▲ 5차전 - 심정수의 원 맨 쇼(현대 4-1 삼성)

한국시리즈 내내 침묵을 지켜 ‘FA 예비 고객’인 삼성을 봐 주는 것이 아니냐는 얼토당토 않은 루머에 시달렸던 현대 심정수가 폭발했다. 직구 타이밍에 맞춘 스윙을 고집하며 한 우물을 팠던 심정수는 1회 1사 1,2루에서 130m까지 대형 3점홈런을 날린 뒤, 3회에도 좌전 적시타를 때렸다. 팀의 4득점이 몽땅 심정수의 몫이었다.

▲ 6차전 - 기다리는 자 복이 있나니(삼성 1-0 현대)

8회까지 양팀 타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침묵했다. 0-0으로 이어진 투수전을 끝낸 것은 호쾌한 방망이가 아니라 ‘인내심’이었다. 9회말 삼성의 마지막 공격때, 병살 플레이를 의식해 서두르던 현대 2루수 채종국의 실책으로 만들어진 1사 만루 찬스. 삼성 로페즈는 끝까지 방망이를 돌리지 않았고, 결국 끝내기 밀어내기 볼 넷을 골라 삼성에게 승리를 안겼다.

▲ 7차전 - 설마했는데… 3번째 무승부(삼성 6-6 현대)

시작부터 시끌시끌했다. 1회초 현대 수비진은 한국시리즈 사상 첫번째 삼중살(트리플 플레이)을 기록해 코끼리 감독을 ‘열 받게’ 하더니 1회말엔 전준호가 역시 한국시리즈 사상 첫번째 홈스틸을 성공시켜 휘파람을 불었다. 5회 타선이 폭발한 삼성은 6득점해 승부를 뒤집었고, 현대도 게임을 포기하는 듯 했다. 그러나 믿었던 삼성 임창용이 연속 안타를 맞으며 ‘불 쇼’를 벌였고, 결국 6-6 무승부.

▲ 8차전 - 최고의 저격수 전근표(현대 3-2 삼성)

삼성의 에이스 배영수가 현대의 ‘ 대타 전문’ 전근표의 한방에 글러브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2 - 1로 삼성이 리드하던 7회말 1사 2루, 현대 타자를 꽁꽁 묶었던 배영수는 한 개의 공을 잘못 던져 눈물을 흘렸다. 전근표의 표현대로 “딱 치기 좋은 코스”의 공이 가운데로 몰렸다. 전근표는 이것을 놓치지 않고 담장을 넘겼고, 역전 결승 2점 홈런은 전근표를 한국시리즈의 ‘깜짝 스타’로 만들었다.

▲ 9차전 - 야구로 시작해 수구로 막을 내리다(현대 8-7 삼성)

경기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심상치 않았다. 2회 현대가 무려 8점을 뽑아낼 때만 해도 경기는 싱겁게 끝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비는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1회 1점을 냈던 삼성은 4회 3점, 6,8회 각각 1점씩을 뽑아 6 - 8로 현대를 뒤쫓았다. 9회 2사 1,2루 찬스에서 삼성 신동주는 평범한 내야 플라이를 쳤지만, 현대 유격수 박진만의 시야가 빗물에 가려 공을 떨궜다. 순식간에 8 - 7 한 점 차 승부가 됐고, 2사 1,2루의 찬스가 계속됐다. 그러나 대타 강동우의 타구가 현대 1루수 이숭용의 글러브에 걸려들었고, 이숭용은 텀벙텀벙 빗물을 가르며 1루 베이스를 밟아 경기를 끝냈다.

김응용 감독에 이어 두번째로 한국시리즈 2년 연속 우승의 신화를 만든 김재박 감독은 “(김응용 감독에게) 할말이 많지만 꺼내지 않겠다”며 팽팽한 신경전을 마무리했다. 한국야구의 대표 감독이었던 김응용 감독을 이젠 넘어섰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한준규 기자 manbok@sportshankook.co.kr


입력시간 : 2004-11-10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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