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 뒤에 숨겨진 로맨스

[영화 되돌리기]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명화 뒤에 숨겨진 로맨스

‘창조성과 고통(Creativity and Disease)’란 책을 쓴 필립 샌드블룸은 예술과 경험이 밀접한 상관 관계를 보인다고 말한 바 있다. 의사인 지은이는 특히 예술가들이 겪고 있는 질환이 그의 창작에 미치는 영향을 발견하고 책 속에서 그 예를 기술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고흐의 그림 ‘까마귀가 나는 밀밭’에는 조증과 우울증에 빠져 버린 화가의 히스테릭한 정서가 드러나고, 위트릴로의 ‘몽마르트의 풍자’에는 화가를 나약하고 음울하게 만든 알코올의 착란 효과를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강력 환각제인 메스칼린에 탐닉된 보들레르가 쓴 시, 투렛증후군에 시달린 모차르트가 작곡한 음악, 매독으로 광기의 증상을 보인 니체가 쓴 책, 선천적 기형으로 꼽추였던 로트렉이 그린 그림 등 예술가의 작품 속에는 자연스레 작가의 삶이 배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작품 속에 자신을 꽁꽁 숨긴 예술가들이 종종 있다. 작가의 생애가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그렇다. 서양 미술가들 가운데 빛을 가장 잘 이해한 화가로 알려진 베르메르의 삶처럼 말이다. 일생 동안 35작품 밖에 남기지 않은 베르메르의 삶은 그 간 미술사가 사이에서 미스터리로 남겨져 있었다.

베르메르가 불러 일으키는 이러한 신비스런 정서는 결국 소설가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결국 소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소설은 피터 웨버 감독에 의해 영상으로 재탄생했다.

영화(소설 역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베르메르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작가 베르메르 사이에 어떠한 일이 일어난 것일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여기에는 베르메르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고증과, 아직은 미스터리하지만 조금은 신비의 베일을 벗은 베르메르의 삶에 대한 이해가 곁들여져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델프트 시. 화가 베르메르는 후원자의 재정적 지원을 받으며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는, 일상에서는 건조하되 예술에서 만큼은 열정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사실은 장모집에 얹혀 사는, 조금은 무능력한 남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베르메르가 다작을 하지 않으면서도 넉넉하게 살 수 있었던 데는 장모의 경제적 조력이 큰 힘이었다. 그는 가장으로서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순응하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집에 새로운 하녀 그리트가 들어오고 베르메르는 그리트의 때 묻지 않은 처녀성에 점점 매료되어 간다.

남편의 위험한 감정을 눈치챈 베르메르의 부인은 질투심에 불타지만 베르메르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리트를 화실로 끌어 들인다. 그리고 그녀에게 진주귀걸이를 건네 주며 그것을 단 그리트의 모습을 그려 나간다. 이 그림이 바로 북유럽의 모나리자처럼 신비스런 미소를 머금은 그림으로 유명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이다.

소설과 영화의 모티브가 된 그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영화는 이 그림에 담긴 비밀을 풀어 나가는 과정이다. 도대체 이 신비한 소녀가 어떻게 해서 값나가는 초상화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소녀의 순진한 듯 하면서도 매혹적인 눈빛과 머뭇거리는 듯한 청순한 입매는 과연 어떤 비밀을 담고 있는 것일까?

영화와 소설은 그리트와 베르메르가 화실에서 나눴을 법한 비밀스런 정념을 상상해 본다. 둘의 아슬아슬한 감정이 그림 속 소녀의 흔들리는 시선에 담겨 있고, 맺어질 수 없는 사랑을 나눠야 하는 불안한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 뭔가 말하려는 입매로 표현돼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영화와 소설은 말하고 있다.

과연 이 둘의 로맨스가 사실일까 순전히 허구일까? 어쩌면 이 이야기가 사실이냐 아니냐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상상력을 발휘해 명화를 읽어 내는 작가의 재치다. 영화의 원작자 슈발리에가 선사하는 그림 읽기의 즐거움을 이 영화에서 찾아보는 건 어떨지.

정선영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4-12-08 18:55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