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애창곡 '허무한 마음' 극장쇼 무대의 슈퍼스타

[추억의 LP여행] 정원(上)
불멸의 애창곡 '허무한 마음' 극장쇼 무대의 슈퍼스타

1960년대 극장 쇼의 슈퍼 스타 정원. 그는 방송이 아닌 라이브 무대와 음반만으로 정상의 인기를 누린 특이한 가수였다. 지금도 올드 팬들의 애청곡인 대표곡 ‘허무한 마음’, ‘미워하지 않으리’, ‘내 청춘’ 등을 비롯해 그가 남긴 600여곡 중 방송 차트에 올랐던 곡은 한 곡도 없다.

이름보다는 노래로 더 알려진 그는 원조 언더 그라운드 가수로 불릴만 하다. 방송 개국 러쉬가 이뤄졌던 60년대는 여전히 극장쇼 무대의 비중이 방송에 버금가는 비중을 지녔었다. 패티김, 이미자, 박재란, 최숙자, 최희준, 김상희는 말이 필요 없는 60년대 최고 스타였지만, 극장쇼 무대의 스타는 그들 외에도 정원, 쟈니리, 이금희가 공존했다.

주류 방송 가수가 아닌 정원이 60년대 각종 신문, 잡지와 전국의 방송국에서 50여개의 가요상을 휩쓴 최고 가수로 군림했던 것은 그 같은 시스템때문. 세월과 함께 이름은 잊혀졌지만 정원의 음반들은 마니아들에겐 여전히 수집 아이템으로 꼽히는 것도 그 덕택이다.

정원의 본명은 황정원. 일본 유학을 다녀와 외자청(현 조달청) 공무원을 지낸 부친 황종호씨와 원산의 명문 루시고녀 출신인 모친 최복녀씨의 5남 1녀 중 장남으로 1941년 2월 23일에 금강산 마을로 유명한 강원도 고성군 장전읍 장전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말을 타고 사냥과 음악을 즐겼던 호탕한 분이셨고 모친은 농구 선수 출신이었다.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축음기로 일본 노래들을 많이 들었다. 쾌할한 성격의 그는 전쟁 놀이를 좋아했다. 해방 후 대지주였던 할아버지가 친일파로 몰려 서울 신설동으로 이사를 해 동신국민학교에 입학했다. 3학년때 6ㆍ25사변이 터져 경기도 가평으로 피난을 갔다. 1ㆍ4 후퇴 때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피난민 수용소의 수정국민학교에 다녔다.

이후 공무원 부친의 잦은 전근으로 광주 중앙국민학교를 거쳐 여수 동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무려 6번이나 학교를 옮겨 다녔지만 우등상을 받고 축구 선수로도 활약을 했던 모범생이었다. 여수중학에 진학해 운동 선수로 활동하면서 차츰 문제아로 변해 갔다.

여수 시민극장과 동방극장의 지붕을 뚫고 들어가 남인수, 현인의 공연과 악극단 공연을 보기 시작했다. “처음 극장 쇼를 보니 너무 좋았다. 당시엔 남인수, 최숙자의 트로트보다 현인, 윤일로, 안다성, 손시향, 도미의 노래가 리듬이 있어 좋았다. 나이가 든 지금은 트로트도 좋아졌지만.”

아무도 몰래 상경해 명문 경복고에 지원했지만 떨어졌다. 체육 특기생으로 2차로 한양공고 전기과에 입학으나, 아버지가 밀수를 하다 적발되는 바람에 다시 여수로 내려갔다. 가세가 기울었던 이 때 여수수고를 1달, 여수상고 2달을 다니다 그만 두었을 만큼 방황의 시기를 보냈다.

학교 생활에 적응치 못한 그는 레코드가게에서 살면서 폴 앵카, 냇 킹 콜, 미소라 히바리, 프랑크 나가이등 외국 가수들의 노래를 음반과 제니스 라디오를 통해 접하며 가수의 꿈을 막연하게 품었다. 이후 여수 KBS 라디오 밴드가 카바레에서 연주를 할 때 뒷일을 봐주다 가수가 되었다.

트로트가 주류였던 당시 율동을 곁들여 팝송을 노래한 정원은 여수에서는 제법 노래 잘 하는 가수로 알려졌다. 60년 4ㆍ19로 혼란스럽던 때, 여러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나온 뒤 여천군 화양리로 피신해 멸치잡이를 했다. 어느 날, 순천에 동춘서커스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쇼 단원이 되었다.

전국을 돌다 경기도 오산 서정리 비행장 인근에서 1달간 공연 후 무작정 상경했다. 처음 한양공고 친구들 집을 전전했지만 서울역에서 리어커를 끌며 2원짜리 꿀꿀이 죽을 먹으며 부랑자들이 머무르는 남대문 아편골에서 기거하는 힘겨운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중 남대문 시장 자유극장에서 김상국이 ‘블루 벨리’를 부르는 쇼를 보고 여수의 선배인 트럼펫 주자 최정문을 찾아 갔다. 그의 주선으로 밴드마스터 한창길을 만나 구봉서 쇼의 오프닝 무대에 올라갔다. 잔뜩 긴장하고 노래를 시작하는데 한 관객의 야유로 싸움을 벌어졌다.

시작부터 망신을 당했지만 음악친구인 미 8군 기타리스트의 집에 묵으며 화양의 오디션을 어렵게 통과해 결국 미 8군 가수가 되었다. 그때부터 강숙자가 단장인 새나라쇼, 백봉호가 단장인 서울쇼, 백갑진이 단장이 부산쇼등에 객원가수로 스지큐등 경쾌한 외국곡을 불러 인기를 끌었다.

당시 시민회관은 최고의 무대. 그는 하루 4회 공연에 700원(당시 택시 요금이 30원)을 받는 무명 가수였다. 66년 어느날 낙원극장 공연 때 이미자의 첫 남편인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정진흡의 주선으로 쓰리보이가 사회를 보던 시민회관의 이미자 쇼 무대에 서게 되었다. 권혜경 등 인기 가수들이 총망라됐던 어느 날 공연. 유독 관객들의 반응이 없었다.

순서가 오자 겁도 나고 최장권 악단이 악보를 요구하며 반주를 거부해 포기하려 했다. 시민회관 단장의 도움으로 겨우 무대에 오르는 무명 가수의 서러움까지 겪자 오기가 발동했다. 강한 인상을 주기위해 얼굴에 검은 색 칠을 하고 도리구치 모자를 쓴 채 와이셔츠를 밖으로 빼 묶는 특이한 모습으로 무대에 나갔다.

우선 ‘하운드 독’을 원래의 빠른 템포가 아닌 슬로우 템포로 변형했더니 앵콜이 터져 나왔다. 당황한 밴드의 반대가 있었지만 단장의 요구로 내친 김에 핸드 마이크를 들고 객석을 드나들다 아예 무대에 드러눕는 파격적인 열창으로 무려 4번의 앵콜을 받았다. 시민회관 데뷔무대는 대성공이었다. 단숨에 게런티 3천원의 가수로 떠올랐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12-17 10:14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