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사회와 그들의 적들

[영화 되돌리기] 빌리지
닫힌 사회와 그들의 적들

최근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영화 ‘빌리지‘의 DVD 출시를 기념한 특별 시사회가 파주에 위치한 문화 예술 마을 ‘헤이리’에서 열렸다. 영화 ‘빌리지’가 마을이란 뜻을 가진 것 외에 이 둘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도 없어 보이지만, 주최측은 이들 마을이 어떠한 신념과 이상을 갖고 조성된 공동체란 사실이 갖는 유사성에 착안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두 마을 사이에는 한 가지 중대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바로 ‘소통의 유무’이다.

헤이리 마을은 주거 공간의 창작과 문화 향유의 현장으로서 60% 이상을 일반 공개하는 것이 원칙이다. 사람들은 다양한 문화 장르가 혼재해서 소통하는 그 곳에서 살아 숨쉬는 문화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빌리지’의 코빙턴 마을은 외부와 소통이 불가능한 단절된 공간이다. 이 마을에서는 어느 누구도 외부로 나갈 수 없다. 또한 그 누구도 이 마을을 방문해서는 안 된다. 철저하게 닫혀진 세계다. 영화는 이렇게 폐쇄된 세계가 어떻게 붕괴될 수 밖에 없는지 이야기 하고 있다. 어쩌면 이 영화를 열린 문화 공간 헤이리에서 만나보는 것이 감독의 주제 의식을 살리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영화 ‘빌리지’는 ‘과연 이 곳에 정착한 것이 잘한 일인가’라고 읊조리는 마을 주민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상한 괴물의 출몰로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는 코빙턴 숲 사람들. 이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들’의 위협 때문에 외부와 단절된 채 지내고 있다. 영화의 공포는 이렇게 불가해한 적들의 불길한 존재감 때문에 야기된다.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무한의 실체는 눈으로 대변되는 판단 이성(분별력)을 압도하기 마련이고 이러한 이성의 무능력은 무기력한 공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마을의 공포는 모두 조작된 현실이다. (영화 감상의 흥미는 줄어 들겠지만 미리 밝혀 두자면, 이 사실이 반전의 단서가 된다. 그러나 그다지 쇼킹하지 않고 허술하다는 이유로 이 영화는 지난 해 뉴스위크 선정 최악의 영화 순위에 올랐다). 악으로 가득 찬 속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종의 율도국을 건설하려 했던 이 마을의 장로들은 외부의 적을 끊임없이 출몰시켜 내부의 단결을 꾀하고자 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젊은이들은 무시무시한 ‘그들’의 위협에 몸서리치며 살아온 것이다.

그런데 마을에서 범죄가 일어난다. 시각 장애인 아이비와 정신 지체 장애인 노아 퍼시, 과묵한 청년 루시우스 사이에 사랑과 우정의 삼각 관계가 어긋나 버리면서 노아가 루시우스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이 벌어진다. 생명이 위독해진 루시우스. 그를 살리기 위해서는 읍내에서 약을 구해오는 길 밖에 없다. 이제 마을 장로들은 정체성의 위기를 맞는다. 과연 이들은 이 모든 현실이 조작되었다고 밝힐 것인가? 이 마을은 여전히 공고한 폐쇄 공동체로 남을 수 있을까?

영화는 닫힌 사회를 공포의 공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쓴 칼 포퍼의 주장과 같다. ‘우리 모두는 언제나 틀릴 수 있다’며 진리의 반증 가능성을 주장한 칼 포퍼는 개개인이 개인적인 결단을 내릴 수 없는 부족 사회나 독재 사회를 닫힌 공간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열린 사회는 외부와 내부의 상호 비판이 인정되고 경험을 통한 반증을 통해 끊임없이 오류를 제거해 나갈 수 있는 사회이다.

즉, 진정한 유토피아를 꿈꾼다면 결코 담을 세워서는 안 될 것이다. ‘빌리지’의 코빙턴 마을이 붕괴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닫힌 세계의 본질적인 불완전함 때문이다.

정선영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5-01-26 15:36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