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되돌리기] 닭이 운다, 영화의 봄이 열린다
<사랑의 블랙홀><이프온리><나비효과>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영화는 계속된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는’ 그 순간, 새로운 날이 왔음을 알리는 닭. 바로 을유년 닭의 해가 밝았다. 닭은 우리네 문화 속에서 흔히 캄캄한 어둠 속에서 새벽을 알리는 상서로운 새로 여겨진다.

옛 기록을 보면 고려 왕실에서는 닭 울음을 새벽 시보로 이용했다고 하고,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이 시간을 알기 위해 닭을 지니고 갔다고 한다. 또한 닭이 귀신이나 요괴도 물리치는 능력이 있다고 믿어, 새해를 맞이하는 가정에서는 닭이나 호랑이, 용을 그린 그림을 벽에 붙여 액을 몰아 내기도 했다. 그런데 신통방통 상서로운 이 닭처럼 앞날을 예견하는 동물이 미국에도 있다. 바로 다람쥐과 동물인 마못이다.

마법에 걸린 일상, 하루 동안의 에피소드
그라운드호그(groundhog)로 불리는 마못은 미국에서 봄의 전령사로 불린다. 우리나라의 경칩처럼, 미국인들은 펜실바니아의 마못이 전해주는 봄 소식에 귀를 기울인다. 그 날이 긴 겨울잠을 자던 마못이 깨어나는 날, 그라운드 호그 데이(Groundhog Day: 일명 성촉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풍습이 더 있다. 겨울잠을 자다 나온 마못이 자신의 그림자를 보면, 겨울이 6주 동안 더 이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흔히들 ‘마못의 예언’이라고 부른다.

2005년 새해의 첫 날, 긴 겨울잠을 깨고 봄의 시작을 알리는 마못의 영화를 보는 건 어떨까? (닭의 해라고 ‘치킨 런’이나 보고 있는 건 너무 궁색하지 않은가?) 마못이 등장하는 이 영화는 제목부터 ‘마못의 날(Groundhog Day)’이다. 하지만 번역 제목은 ‘사랑의 블랙홀’이다. 왜 블랙홀인가? 사랑에 밑도 끝도 없이 빠져든다고? 사실은 시간의 블랙홀이라고 더 정확한 말이다. 영화는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반복되는) 마못의 날을 그리고 있다.

잉여의 시간과 추격, 그리고 사랑의 눈물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며 민주주의를 염원하던 우리의 신념과는 달리, 영화 속에서는 마못이 아무리 봄 소식을 알려도 새 봄은 끝까지 오지 않는다. 끊임 없이 반복되는 하루 동안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가 잔재미를 주는 영화 ‘사랑의 블랙홀’.

영화의 주인공은 어느 한 시건방진 TV 기상 캐스터다. 제멋대로 자기중심적인 주인공 필 코너스는 매년 2월 2일만 되면 필라델피아 펑추니아 마을로 성촉절 취재를 나간다. 하지만 그런 별 볼일 없는 뉴스 거리를 전달하는 게 불만인 필 코너스는 취재를 위해 마을에 머물고 있는 것 조차도 내키지 않아 한다.

그런데 하루도 더 있고 싶지 않은 주인공 필 코너스에게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진다. 이튿 날 깨어나고 보면 매일 매일이 2월 2일 성촉절인 것이다. 처음에는 당황하지만 금새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얻게 되는 삶의 예지력을 즐기게 되는 주인공. 여자도 꾀어 보고 돈도 훔치는 축제 같은 나날들을 즐긴다. 하지만 줄기차게 반복되는 일상에 어느덧 신물이 난 주인공은 자살까지 감행하며 탈출구를 찾지만 내일이 없는 그에게는 죽음도 허락되지 않는다.

자포자기한 그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처럼 동료 PD 리타가 등장한다. 여느 여자에게 수작을 걸듯이 리타를 꾀어 보지만 왠지 그녀는 만만찮은 상대다. 매일 매일 작업을 걸어도 다음 날만 되면 도루묵이 되어 버리는 현실 앞에서 또 한 번 좌절한 코너스는 결국 모든 수작을 포기하고 불현듯 개과천선한다. 삶의 예지력을 건전하게 이용하기 시작하며 마을 주민들의 사랑을 받게 되는 필 코너스는 과연 어떻게 될까? 과연 마못의 날이 끝나고 새봄이 찾아 오기는 할까?

인생을 건 마지막 시간여행
닭이 횃대에 올라가 목에 핏줄이 서도록 울어도 새벽이 오지 않는 영화가 또 한 편 있다. 그런데 ‘사랑의 블랙홀’과 다르게 단 하루만 반복되는 영화 ‘이프 온리’이다. 일 중독증의 남자 친구 이안과 바이올리니스트 사만다가 사랑의 블랙 홀에 빠져든다는 설정의 영화에서 그에게 하루라는 잉여 시간이 주어진다. 그 시간 동안 여자 친구를 살려야 하는 임무가 그에게 주어진다.

영화는 사만다의 졸업 연주회날에서 시작된다. 여자 친구 부모님의 재혼식에도 참석하기 힘들다는 이안의 얘기에 서운해진 사만다는 자신의 졸업 연주회 날까지 잊은 그에게 크게 실망한다. 겨우 연주회를 찾은 남자 친구의 불성실한 태도도 못마땅한 사만다는 결국 이별을 통보한 뒤, 그 길로 택시를 타고 가다 그만 교통 사고를 당한다. 자신의 불찰로 여자 친구를 잃은 이안은 여자 친구의 일기장을 읽다가 잠이 든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놀랍게도 죽은 여자 친구가 아무렇지도 않게 한 침대에서 깨어나는 것을 본다. 뒤늦게 자신에게 어제와 같은 하루가 주어진 걸 안 이안은 이 날 만큼은 여자 친구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잉여의 시간은 누군가의 삶을 담보로 하고 있다. 이 하루가 끝나면 결국 누군가는 세상을 등져야 하는데…. 서로에게 잊을 수 없는 사랑의 추억을 남기고픈 연인들의 사랑이야기 ‘이프 온리’. 있을 때 잘 하라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새삼 떠오르는 영화다.

닭을 회 쳐 먹든, 삶아 먹든 우리네 현실에서는 언제나 새벽이 온다. 그런데 하루 하루 지나면서 늘어나는 게 후회뿐이라면 어떨까? 그럴 때 시간을 한번쯤 되돌리고 싶지 않을까? 그럴 땐 마지막으로 영화 ‘나비 효과’를 보자.

어린 시절 끔찍한 사고로 순간마다 기억을 잃어 버리는 주인공 에반은 정신과 의사의 권유로 매일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어느 덧 대학생이 된 에반. 우연히 읽어 내려 간 일기장에서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통로를 발견하고는 과거의 끔찍한 경험들을 되돌리려 애쓴다. 하지만 과거가 바뀔수록 주변인들의 인생은 엉망이 되어간다. 사랑하는 여자친구 켈리는 창녀가 되고 토미는 소년원에 가고 레니는 정신 병원에 수감되어 버리고. 아무리 과거를 재구성해 봐도 주인공의 인생은 꼬여만 간다. 결국 에반은 자기의 인생을 걸고 마지막 시간 여행을 감행한다.

어린 시절 사소한 일 하나가 일생을 좌우한다는 교훈을 안겨 주는 영화 ‘나비 효과’. 올 한해 결코 후회하지 않은 선택을 하기 위해서 잊지 말아야 할 단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말일 것이다. 베이징의 사는 나비의 날갯짓이 뉴욕에 폭풍을 일으키듯, 새해 아침 얼떨결에 켠 기지개가 저 먼 타국에 해일을 일으킬지도 모르니.

지금까지 시간을 되돌이키며 과거의 후회된 일을 만회하려는 영화 세 편을 살펴봤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과거를 번복할 잉여의 하루가 주어지지 않는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말한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처럼 매일 뜨는 태양도 알고 보면 날마다 새로울 테니까.

2005년 을유년도 새로운 해를 길게 드리우고 있다. 지난 해 다시 연초로 돌아가 뭔가를 제자리로 되돌리고 싶었던 사람들이 과거를 만회하기보다 미래를 설계하는 데 눈을 돌려야 할 때다. 을유년 새해에 긴 홰를 친 장닭이 지난 해 횡행했던 경제 불황의 유령과 자연 재해의 요괴, 취업난의 귀신을 물리쳐 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정선영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5-02-02 11:50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