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기 대신 통키다영원히 기억될 '포크 빅3'

[추억의 LP 여행] 윤형주 下
청진기 대신 통키다
영원히 기억될 '포크 빅3'


윤형주, 송창식은 조영남과 캐롤이나 리싸이틀 쇼 음반은 물론 공연도 함께 하는 등 최영희 등과 함께 어울리며 두터운 음악적 친분을 유지했다. 학업 때문에 경희대 의대로 옮긴 윤형주는 의대 공부보다는 신방과 후배 김세환과 함께 히트 곡 ‘‘라라라’가 수록된 스플릿 음반 ‘별밤 씨리즈 3집-71년’을 발표하고 DBS라디오의 팝송 프로 ‘0시의 다이얼’ DJ로도 변신하는 등 음악 활동을 계속했다.

수천명 씩 모이는 대학가의 행사나 MBC ‘‘ 별 밤 회원’ 야유회 등에 함께 참가한 윤형주, 김세환은 대단한 인기를 구가했다. 특히 그들이 명동의 DBS 팝 패밀리 사무실에 나타나는 날에는 1~2백명의 여고생들이 몰려들어 백화점 영업이 어려웠을 정도. 솔로 가수 윤형주는 71년부터 ‘랄랄라’, 72년 ‘두 개의 작은 별’ ‘우리들의 이야기’, 73년 ‘어제 내린비’, 74년 ‘미운 사람’ 등 히트 퍼레이드를 벌였다. 또한 오란C, 롯데껌, 새우깡 등 전체 광고 음악의 30%에 달하는 1,400곡을 도맡으며 더욱 대중적으로 파고 들었다.

그처럼 은퇴 선언을 반복한 가수도 없을 것이다. 의대를 9년이나 다녔지만 본과 3학년을 끝으로 중퇴를 했다. “의사는 환자를 기다리는 수동적 입장이라는 엉뚱한 비관론을 가졌던 것이 음악 활동을 다시 시작한 계기가 되었죠.” 성공적인 가수 활동에도 불구하고 72년 12월 또 다시 은퇴 선언과 고별 공연을 했다.

TV에도 방영된 이 공연의 사회자 최희준은 “법대를 졸업한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한 번도 은퇴를 생각 못했는데, 윤형주는 젊은 나이에 2번씩이나 은퇴를 선언하는 용기가 부럽다”고 농담을 건냈고 군복무중인 조영남은 휴가를 얻어 군복 차림으로 게스트가 되어 끈끈한 정을 과시했다. 은퇴 공연의 레퍼토리는 73년 ‘윤형주 리사이틀’ 음반으로 발표되었고 대도레코드는 69년부터 73년까지의 히트 곡 모음집까지 발매했다.

하지만 73년 영화OST인 ‘어제 내린 비’를 발표해 5만장의 판매되는 빅 히트를 터트리자 “은퇴 선언을 수 없이 번복한 가수”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74년 YMCA에서 개최한 구두닦이 소년들을 위한 자선 공연에 무료 출연한 그는 3월엔 4살 아래의 홍대 미대 출신 김보경 씨와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습관성 약물 중독설과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면서 76년 2월, 징역1월 6개월에 집행 유해 3년을 선고 받으며 잊혀졌다.

활동 금지중이던 79년 1월 일간스포츠에 ‘속죄의 봄을…’, 11월 경향신문에 ‘어둠 속 우리의 모습 – 회한의 4년’이란 대마초 가수의 고백 수기를 발표했다. 이 후 80년 해금이 되자 5년 만에 ‘바보’‘고백’등이 수록된 독집 음반을 발표했다. 1백 여 곡의 노래를 작곡한 그는 창작 곡 ‘바보’를 자신의 특성에 잘 맞는 노래로 꼽는다.

특히‘사랑스런 그대’는 KBS 인기가요TOP 10과 MBC 인기가요 퍼레이드에 5위에 랭크되며 재기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에 81년엔 MBC FM의‘한밤의 데이트’의 진행을 맡게 되었다. 또 송창식과 10년 전에 발표한 트윈폴리오 음반과 같은 레퍼토리에다 송창식이 작곡한 ‘우리’를 추가시킨 프로젝트성 음반을 발표했다.

82년 송창식과 ‘긴 머리 소녀’‘편지’‘축제의 노래’ 등을 수록한 금성사 판촉 카세트 테이프까지 발매하자 트윈폴리오의 재결합설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83년 12월 쌍룡 김석원 회장의 도움으로 김세환은 송창식과 함께 도너츠판, 책자가 들어 있는 ‘하나의 결이 되어’라는 박스 음반을 발표했다. 이 음반은 84년 KBS 가요대상에서 트리오 음반 기획상과 가톨릭 매스컴 위원회 공로상을 안겨 주었다. 재기에 성공한 그는 85년 광고 기획사 한빛기획’을 창립해 용평 팝 페스티벌, 태교음악회등 각종 콘서트를 기획하는 사업가로 거듭났다.

86년 미국 LA 슈라린 오디토리엄의 포크 페스티벌. 송창식 양희은 이장희 김세환 이종용등 70년대 포크 가수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다. 6,800여명의 교포들에게 고국에 대한 향수를 듬뿍 안겨 주었던 이 공연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하다. 88년 창작 곡 10곡을 모아 6년 만에 신보‘사랑하는 사람이라면’을 발표하고 KBS 2FM에서 ‘윤형주의 음악앨범’의 DJ로‘뮤직 엉클’이란 애칭을 얻었다.

이후 자유방송인협회 공동 부의장을 맡고 93년 교통방송의 ‘밤과 음악 사이’, 10월에는 SBS TV의 심야프로 ‘SBS 콘서트’를 진행한 데 이어 94년 2월 MBC TV ‘음악이 있는 곳에’윤형주 스페셜 프로에 서울음대 작곡과에 입학한 딸 선명과 함께 출연해 건재를 과시했다. 12월에는 KBS 빅 쇼 크리스마스 특집에 송창식과 함께 모처럼 트윈폴리오시萱?히트 곡들을 불렀다. 이 때부터 지금까지 윤형주는 송창식, 김세환과 함께 ‘포크 빅3’로 명명해 전국을 순회하며 올드 팬들을 위한 공연을 지속적으로 열고 있다.

2000년 벤처 기업인 이트보의 부사장으로 취임하며 벤처 사업가로 거듭났다. 또한 2002년 4월에는 한일 포크 가수 1세대들의 조인트 공연 ‘포크 빅3와 일본 포크의 개척자 모리야마 료코의 캠퍼스 콘서트’를 개최해 주목을 받았다. 사회 봉사의 일환으로 사랑의 집짓기 운동엽합회의 헤비타트 운동 홍보 이사로도 활약하고 있는 그는 2003년 7월에는 미국 카네기 홀에서 6명 온 가족이 가족 콘서트를 개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편안함을 주는 많은 창작 곡들을 생산해 낸 포크 아티스트 윤형주. 그는 우여곡절이 많은 음악 활동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전문직 사업가로 본업을 유지하면서도 통기타를 잡고 노래를 계속, 살아있는 한국 포크의 전설로 모범적인 삶을 꾸려 가고 있다.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5-02-24 16:51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