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본능적 회귀와 욕망

[영화 되돌리기]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
삶의 본능적 회귀와 욕망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노인들이 지닌 강렬한 생의 의지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노인들이 젊은이들보다 더욱 삶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욕망의 대상이란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이고,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절박하게 필요한 것들을 갈구하기 마련이니까.

일본의 노장감독 이마무라 쇼헤이를 사로잡은 것도 바로 나이 들어 문득 깨달은 삶에 대해 끓어 오르는 욕정이었다. 여성의 두 다리 속으로, 그 속에 자리한 수줍은 비밀의 계곡 속으로, 계곡의 샘 솟는 물 속으로, 그 옛날 뜨거웠던 바로 그 물 속으로 들어 가고픈 남자의 판타지가 그려진 쇼헤이 감독의 영화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 이 영화를 보면 노장 감독이 깨달은 이 욕정이란 것이 생명 회귀요 여성 예찬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주인공 요스케는 일본의 장기 불황 속에서 실업자로 전락한 중년의 사내. 경제적 무능으로 인해 부부간의 운우지정 마저 잃어버린 그에게, 알고 지내던 걸인이 어느 날 죽으면서 묘한 유언을 남긴다. 노토 반도에 붉은 다리 옆 2층 집에 금불상을 숨겨 놓았다는 것.

장난반 진담반으로 그 곳을 찾은 요스케는 그 집에 살고 있는 노인과 젊은 여성을 만난다. 요스케는 혈연 관계가 없어보이는 이 둘의 동거 생활에 뭔가 사연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우선은 집 안에 숨겨져 있을 금불동에 온톤 마음이 쏠려 있던 터라 크게 괘념치 않았다. 그런데 이 낯선 여자들의 사연보다 그를 잡아 끄는 게 있었으니, 바로 젊은 여성이 뿜어 내는 축축한 기운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욕정에 사로 잡히도록 하는 그 힘은 바로 그녀의 몸 안에서 내뿜는 물이다. 물이 차오르는 순간마다 도벽으로 욕망을 분출해 왔다는 그녀의 사연을 알게 된 요스케는 그녀를 위해 자신의 몸을 허락한다. 이제 금동불은 그의 마음 속에 온 데 간 데 없다. 그녀의 다리 속 따뜻한 그 물이 그의 존재 이유니까.

여성이 뿜어 내는 따뜻한 물. 이 영화의 모든 이야기가 집중되는 소재이다. 그녀의 따뜻한 액체는 초라해진 중년의 남자에게 남성성을 찾게 해 줄 뿐 아니라, 그녀의 따뜻한 물이 강으로 흘러 들어 가면서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최적의 어장을 형성해 마을의 남성들의 삶을 지탱해 주기까지 한다. 일종의 마을의 생명수와도 같다. 재미있게도 영화의 배경인 노토 반도가 온천 휴양지로도 유명하다고 하니 따뜻한 물이 괜한 비유는 아닌 듯 싶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감독이 그려내는 과장된 현실이다. 마르케스의 마술적 사실주의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도시를 뒤덮은 꽃비로 가축들이 질식했듯이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몸에서 물이 분수처럼 솟구치고 그 물이 흘러 흘러 강가에 물고기들을 꼬이게 한다. 이러한 동화적 상상력은 남녀의 교합을 에로틱한 성애이기 보다는 남자가 여성의 자궁으로 돌아가려는 본능적 회귀로 읽히게끔 만드는 장치가 되기도 하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남녀 주인공이 사랑을 나누는 곳은 실제로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이미지를 갖는 원형 콘크리트 속이다. 마치 ‘남성들이여, 따뜻한 물이 샘솟는 여성의 다리 속으로, 그리고 생명의 근원지 자궁 속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듯이 말이다.

이 영화는 일본의 극우주의를 비판한 지식인으로도 유명한 소설가 헨미 요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아마도 일본 사회에 잠재해 있는 남성적 파시즘을 경계했던 헨미 요는 파괴적인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벗어나 평화적인 여성성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꿈꾸었을 것이다. 불쑥 불쑥 극우의 망령이 떠도는 일본에서 여성성의 회귀를 외친 헨미 요와 이를 동화적 환상으로 풀어낸 쇼헤이 감독의 목소리가 공허한 메아리로 떠돌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선영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5-03-22 16:48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