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재기와 위트란 이런 것

[영화 되돌리기] 헤드윅
진정 재기와 위트란 이런 것

2002년 여름. 비가 추적 추적 내리던 늦은 오후, 충무로의 한 시사회실에서 영화 시사회가 있었다. 빗물로 끈적해진 몸으로 습기 찬 지하에 들어가자 열 명도 채 되지 않은 사람들이 영화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날 선보인 영화는 제목부터 낯선 ‘헤드윅’. 그런데 어느 누구도 특별한 것을 기대하지 않았던 이 영화는 눅눅하고 열 없이 영화를 기다린 시사회 관객들에게 예상치 못한 충격과 자극을 한 아름 안겨 주었다.

하지만 시사회의 이러한 전율은 대중의 사랑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 당시 할리우드 블록 버스터급 영화들이 극장을 점령하면서 ‘헤드윅’은 극장에서 금방 막을 내리게 되었고 결국 이 영화를 살리고픈 일부 마니아들 덕에 극장을 옮겨 다니는 릴레이식 상영이라는 고육책을 쓰게 되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토록 스타일리쉬하고 유쾌한 영화가 일반 관객들에게 주목 받지 못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아무래도 트렌스 젠더나 여장 남자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가 우리나라의 일반 정서와 맞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걸작인 이유는 우리에게 불편하게 여겨질 법한 인물군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구태 의연하게 정치성을 띠지 않고, 흥겹고 재미 있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재미는 인상적인 비주얼과 맛깔나는 음악, 그리고 영화를 탁월하게 풀어나간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에서 묻어 나온다.

영화 ‘헤드윅’은 감독 자신이 원작을 쓴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영화로 옮긴 작품이다. 존 카메론 미첼이라는 이 신예 감독은 더 나아가 자신의 영화에 주인공으로 등장해 재기발랄함을 뽐내고 있다. 영화의 배경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의 동 베를린.

엄마와 단 둘이 사는 소년 한셀은 어느 날 한 미군 병사를 알게 되고, 그와 결혼해 미국으로 가는 조건으로 여자가 되는 성전환 수술을 감행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수술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고 그의 성기 1인치가 볼썽사납게 남겨졌다(영화의 원제이자 후에 주인공이 만드는 록 밴드 이름 ‘Hedwig And The Angry Inch, 헤드윅과 성난 1인치’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하지만 ‘헤드윅’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한셀은 미군에게 버림받는다. 후에 헤드윅은 군 부대 근처에서 록 밴드를 결성하고 토미라는 한 소년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토미에게 음악에 대한 모든 정열을 쏟아 부은 헤드윅에게 돌아온 건 헤드윅의 음악으로 스타가 된 토미의 배신 뿐. 헤드윅은 자신의 록 밴드 ‘성난 1인치’와 함께 그의 도플 갱어인 록 스타 토미를 ?아 다니며 그림자 투어를 시작한다.

영화는 남자든 여자든, 남자가 되고 싶은 여자든 간에 모든 인간은 자신의 또 다른 반쪽을 찾아 인생 여행을 떠날 뿐이라고 말한다. 감독은 이러한 메시지를 플라톤의 ‘향연’에서 얻었다고 한다. 원래 하나였던 인간이 제우스에 의해 둘로 갈라지면서 인간은 서로 잃어 버린 반쪽을 찾아 외로움을 달랜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심오한 주제 의식 같지만 영화 속에서는 흥겨운 음악과 현란한 플래시 백, 그리고 재치 있는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생각처럼 무겁지만은 않다. 최고의 록 뮤지컬 영화라는 평을 받고도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한 영화 ‘헤드윅’.

그런데 다음 달부터 무대에 오르는 원작 뮤지컬은 영화와 달리 엄청난 흥행을 예고하고 있다. 인기 배우 조승우가 주연을 맡았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뮤지컬 ‘헤드윅’의 표가 벌써 매진이 된 걸 보면 아무래도 영화의 실패는 순전히 스타성 부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스타의 힘이 작품보다 앞서는 현실이 조금 씁쓸하다.

정선영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5-03-28 17:30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