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상흔과 인간성의 자멸

[영화 되돌리기] 알포인트
전쟁의 상흔과 인간성의 자멸

죽음의 벌판, 킬링 필드(Killing Field)로 기억되는 나라 캄보디아. 1975년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루즈 정권이 200만명이 넘는 주민을 학살하며 캄보디아 역사를 송두리째 뒤틀어버린 지 26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우리에게 캄보디아는 낯선 벌판으로 남아있다. 또 세계 7대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인 앙코르와트의 신비스런 매력까지 더 해, 캄보디아는 왠지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생경함 때문에 캄보디아의 이국적인 풍광을 담아내는 영화들도 많다. ‘툼레이더’의 안젤리나 졸리는 인류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캄보디아 정글로 떠나고 화양연화의 양조위는 앙코르와트 사원에서 옛사랑의 그림자를 찾는다. 이런 영화 속에 등장하는 캄보디아는 원초적 밀림의 공간이면서 비밀의 역사를 기억하는 미지의 공간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영화 가운데에서도 뭔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매력의 캄보디아를 엿볼 수 있는 영화가 한 편 있다.

지난 해 개봉해 그럭저럭 흥행에 성공한 공포 영화 ‘알 포인트’.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하고 있는 이 영화는 사실상 모두 캄보디아에서 촬영됐다. 캄보디아의 밀림과 휴양지, 그리고 음습한 기운이 느껴지는 폐저택까지 촬영 장소 하나 하나에 70년대 전쟁의 광풍으로 폐허가 된 베트남의 실상을 담아 내려는 제작진의 고심이 느껴진다.

우선 영화는 베트남 전쟁 막바지에 비밀 임무를 부여 받은 한 한국군 수색대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도 귀국하지 못하고 새로운 임무에 투입된 9명의 병사는 6개월 전 작전 지역명 ‘로미오 포인트(알 포인트)’에서 실종된 병사들을 찾기 위해 급파된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병사들이 구조 요청을 해 왔기 때문이다.

열없는 태도로 알포인트에 도착한 외인구단 병사들. 그런데 이들을 맞이한 건 실종되었다던 병사들의 생존 소식도 그들의 유골도 아니었다. ‘손에 피를 묻힌 자, 돌아 가지 못한다’는 서슬퍼런 글귀가 씌어진 비석과 죽음의 그림자가 서려있는 폐저택, 그리고 그들 주위를 맴도는 낯선 여인의 환영이었다. 공포스러운 분위기 조성이 이쯤 됐으니 영화는 예정대로, 공포 영화들의 끌리셰(cliche)대로 수색 대원들의 목숨을 앗아간다. 마찬가지로 관객은 예상 가능한 공포 속으로 내몰린다. 그리고 관객은 깨닫는다. 이 모든 공포의 실체가 결국 목적도 실체도 없이 무고한 생명을 앗아 가는 전쟁이라는 사실을. 영화는 이 처럼 전쟁의 상흔이 남겨진 폐허 속에서 자멸하고 마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비극의 공간이 바로 킬링 필드의 참혹함이 서려 있는 캄보디아이다.

하지만 영화가 보여 주는 캄보디아가 이러한 광기와 고통의 공간만은 아니다. 영화 속에서는 캄보디아 식민지 시대의 최고 휴양지인 시아누크빌 해변과 원시 밀림을 간직한 남부 해안 도시 캄폿 그리고 유네스코 보호 관리 구역으로 지정된 캄폿 인근의 보코힐까지, 때 묻지 않은 자연 경관을 엿볼 수 있는 풍광이 등장한다. 특히 영화의 주배경이자 최후의 격전지인 보코힐 저택은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폐저택으로 앙코르와트와는 또 다른 신비스런 매력을 풍긴다. 새벽 짙은 안개가 끼면 그 모습을 감춰버리는 보코힐 저택은 이 곳 주민들 사이에서 귀신의 집으로 불린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공포영화 찍기에는 안성맞춤으로 보인다.

무섭게 보면 그만인 게 공포 영화이긴 하지만 영화 ‘알 포인트’를 보면서 캄보디아 여행을 한 번 꿈꿔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다. 다행히 오는 4월부터 국내의 한 항공사가 앙코르와트가 위치한 시엔립에 신규 취항한다는 소식도 들리니 한 번 아름다운 폐허를 간직한 나라 캄보디아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

정선영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5-04-06 15:02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