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진출 6년만에 '메이저 퀸' 등극···강한 승부사 기질 뒤늦게 진가 발휘

필드의 '작은 거인' 장정 별로 뜨다
미국진출 6년만에 '메이저 퀸' 등극···강한 승부사 기질 뒤늦게 진가 발휘

지난해 12월 4일 한일여자프로골프 대항전 첫날 경기가 펼쳐진 일본 시가현 오츠골프장. 일본의 오야마 시호에 6홀차 압승을 거두고 한국에 첫 승전보를 전한 장정(25)은 클럽하우스에 마련한 기자회견장에 “만세”를 크게 부르며 입장, 한국측 관계자와 기자단을 즐겁게 한 적이 있다.

경기 결과에 관계없이 언제나 싱글벙글 환한 표정에 말도 재미있게 하는 ‘명랑소녀’ 장정은 어딜가나 분위기 메이커다. 그래서 동료 골퍼들은 물론 취재진들에게도 인기가 좋다. 비록 우승기록도 없고 신체조건 때문에 스폰서에게는 인기가 없었지만.

그 당시 장정은 미국 무대에서는 왜 우승신고가 늦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내년에는 반드시 1승을 올릴 거니까 지켜보세요”라며 약속했다. 대회에 나갈 때마다 우승 꿈을 꿔왔다는 장정. 그는 2000년 데뷔 이후 148개 대회 만인 브리티시여자오픈에서 결국 그 꿈을 이뤘다.

‘자고 일어나보니 유명해졌다.’ 2일 우승트로피를 안고 금의환향한 장정 만큼 이 말이 실감나는 경우가 또 있을까. 장정은 당초 대회가 끝난 뒤 조용히 국내에 들어와 이빨 치료도 받고, 회나 김치찌개 등 먹고 싶었던 한국 음식을 실컷 먹는 등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떠날 계획이었다. 하지만 장정은 각종 인터뷰 요청과 행사 초청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등 우승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SK, KTF 등 몇몇 대기업에서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리고 있다.

장정은 또 10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데저트팜에서 열리는 ‘별들의 전쟁’ 삼성월드챔피언십(총상금 85만 달러) 초청장도 받았다. 이 대회는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 투어 정상급 선수 20명 만 초청해 치러지는 특급 이벤트다.

‘유리구두’가 우연히 손에 들어왔을까. 신데렐라가 되기까지 결코 순탄하지 못했다. 키 큰 두 언니(첫째 미경 씨는 173㎝, 둘째 은경 씨는 163㎝)에 비해 턱없이 작은 153㎝의 작은 체구, 변변한 스폰서 하나 없어 투어 경비를 아끼기 위해 아버지 장석중(60) 씨와 미국 전역을 중고 밴으로 옮겨 다녀야 했던 고달픈 투어 일정, 박세리 박지은 김미현 등에게 앞 자리를 내준 채 늘 스포트라이트의 그늘에 가려 있었던 6년간 무관의 세월.

3일 귀국 기자회견에서 “한국선수들이 너무 많아 장정은 있는 줄도 모르셨죠. 이제는 장정도 응원해 주세요”라고 밝힌 장정의 애교 섞인 주문에 그 동안 겪었을 고단함이 배어나왔다. 하지만 장정은 7~8시간 정도 거리는 차로 이동하는 것이 수다도 떨고 가다가 밥도 해 먹을 수 있어서 더 편하고 즐거웠다는 말로 웃어넘겼다.

성격이 운명을 만든다고 했다. 장정에게는 이 같은 고난을 이겨낼 만한 강인한 정신력과 함께 넉넉한 웃음이 있었다. 장정은 지독한 연습벌레다. 신체적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땀을 흘려야 했다. 특히 지난 겨울 스폰서 초청으로 각종 행사에 끌려다니는 다른 선수와는 달리 장정은 동계훈련에만 전념했다. 장정의 장점인 정확성과 일관성은 혹독한 훈련의 결과다.

드라이버 비거리는 245.5야드로 82위 수준에 불과하지만 78.5%(12위)에 이르는 페어웨이 안착률, 65%(24위) 수준의 그린적중률, 13위에 해당하는 홀당 평균 퍼트수(1.8개) 등 골프의 3박자 모두 정상급의 실력을 자랑하고 있다.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는 “장정을 우승으로 이끈, 나긋나긋하면서도 한결 같은 스윙 리듬을 팔 수 만 있다면 갑부가 될 것”이라고 썼다. ‘원조 땅콩’인 김미현처럼 장정도 ‘우드 아티스트’다. 골프백에 들어있는 우드는 드라이버를 비롯해 3,5,7,9번 등 모두 5개. 특히 장정은 장기인 9번 우드로 결정적인 찬스를 만들어내곤 한다.

장정을 한국인 네 번째 메이저 퀸으로 만든 요인에는 그의 당찬 유전자도 적지않은 몫을 맡았다. 1일(한국시각) 열린 브리티시여자오픈 최종라운드는 챔피온조로 묶인 장정과 아니카 소렌스탐(스웨덴)의 맞장 대결의 양상이었다. 비록 타수는 5타차가 났지만 여느 선수들처럼 역전에 능한 골프여제의 위세에 눌려 장정도 첫 승의 기회를 날려버릴 것이라는 우려의 소리도 적지 않았?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장정은 믿기 힘들 정도로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소렌스탐이 라운드 내내 침착성을 잃지 않은 장정의 정확한 플레이에 주눅이 든 탓인지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장정의 챔프 등극에 들러리를 서야 했다. 장정은 소렌스탐과의 대결에 대해 “내 플레이에만 신경을 썼기 때문에 부담 같은 것은 없었다”며 당당한 표정이었다.

사실 장정은 두둑한 배짱과 침착함이 필요?매치플레이에 유독 강한 면모를 자랑하고 있다. 장정의 진가는 매치플레이로 치러지는 한일여자프로골프대항전에서 빛을 발해왔다. 장정은 일본 선수들과의 맞대결에서 역대 5승2무1패로 박세리(6승2패)보다 앞선 최고 승률로 ‘일본 킬러’의 명성을 과시하고 있다.

장정의 이 같은 장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장정의 혈액형에서 상당부분 해답을 찾을 수가 있다. 장정은 전형적인 O형이다. 스포츠에서는 O형이 타고난 승부사 기질로 큰 경기에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세리와 박지은 김주연 장정으로 이어지는 4명의 메이저 퀸. 이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O형이다. 이들 4명 모두 강심장의 소유자들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메이저 4승의 박세리는 연장전 불패(4승 무패)의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알아주는 싸움닭인 박지은은 ‘매치플레이 퀸’의 별명을 갖고 있고 뚝심의 김주연은 US여자오픈 최종 홀 위기에서 극적인 버디를 이끌어내는 드라마를 연출했다.

메이저 1승의 ‘대장정’을 완성시킨 또 하나의 요인은 ‘충청의 힘’이었다. 장정을 골프인생으로 이끈 것은 박세리가 던진 운명의 끈이었다. 장정은 박세리와는 대전 유성의 이웃사촌으로, 장정의 둘째 언니는 박세리와 유성 유아원 동기생으로 서로 집에 놀러 다닐 만큼 가까웠다.

장정이 골프를 시작하게 된 것도 박세리의 활약에 자극을 받았던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이후 장정은 박세리가 미국으로 가기 전까지 유성CC에서 연습라운드를 하면서 내기 골프도 할 만큼 친자매처럼 지내기도 했다. 아버지 장석중 씨는 여름에 장정과 박세리가 계룡산 계곡에 텐트를 치고 훈련을 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장정과 함께 국가대표로 1998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한국의 단체전 은메달을 이끈 고향 1년 후배인 김주연 역시 박세리가 골프인생의 나침반 역할을 했다. 이들 3명 모두 미국 진출 후 첫 우승을 메이저 타이틀로 장식한 것은 얼마나 기묘한 인연의 변주곡인가.

‘작은 거인’ 장정은 11일 미국으로 떠나 새로운 장정을 시작한다.


김병주 기자


입력시간 : 2005-08-11 16:45


김병주 기자 bjki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