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투 동막골' 전쟁의 포화 속에서 피어난 훈훈한 휴머니즘이 쓴 감동의 서사시

인간애, 이데올로기를 허물다
'웰컴 투 동막골' 전쟁의 포화 속에서 피어난 훈훈한 휴머니즘이 쓴 감동의 서사시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태극기 휘날리며>는 한국 현대사의 기억을 영화의 소재로 삼은 공통점이 있다. 역사적 사실 또는 가정에서 출발한 이들 영화는 모두 대단한 흥행 성공을 거두었다는 공통점도 지니고 있다.

<웰컴 투 동막골>(이하 <동막골>)은 이 같은 한국영화의 역사 되짚어보기의 최신 버전이라 할 만하다. 과거 1980년대였다면 역사적 사실에 한 걸음이라도 가까이 가려는 장치들을 강구했겠지만 이젠 우회적으로 또는 상상력을 통해 역사를 재평가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동막골>은 이미 2002년 연극연출가이자 영화감독인 장진의 손에 의해 무대에 올려진 바 있다. 당시 기록적인 성공을 거둔 연극의 재미를 스크린 위에 옮긴 <동막골>은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휴머니즘이라는 보편적 이상이 줄 수 있는 감동을 최고치까지 끌어올린다.

동막골에 가봤더니

1950년 11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 연합군 병사 스미스(스티브 태슐러)의 전투기가 동막골에 불시착한다. 이를 목격한 ‘상태 안 좋은’ 동막골 소녀 여일(강혜정)은 연합군과 국군의 북진 공격에 쫓기는 인민군 리수화(정재영) 일행을 만나 동막골로 데려오고, 탈영한 국군 표현철(신하균) 소위와 위생병 문상상(서재경) 일행 역시 외딴 마을 동막골에 흘러든다.

총이라고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때묻지 않은 오지 마을에서 국군, 인민군, 연합군이 한 데 모이게 되자 팽팽한 긴장 관계가 형성된다. 하지만 북진 보급로를 확보하려는 미군에 의해 동막골에 폭격이 가해지려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마을에 모인 서로 다른 이념의 군인들은 모두 한 마음이 돼 동막골 사수 작전에 나선다.

연극으로 성공한 탄탄한 원작이 있었다고 하지만 <동막골>의 제작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쉴 새 없이 속사포 대사가 이어지는 3시간 분량의 연극 대본을 압축해 시나리오로 탈바꿈시키는 작업부터 1950년대 구중심처에 자리한 강원도 산촌 마을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유랑 극단처럼 떠돌았던 촬영, 예정보다 제작 일정이 길어지면서 제작비가 80억원까지 치솟으며 흉흉한 소문까지 났던 과정을 생각하면 제작진은 지금도 아찔한 기분이 든다고 말한다.

사실적이었던 연극을 ‘판타스틱’한 영화로 만들기 위해 들어간 공력도 눈물 겹다. 세밀한 조사와 경험을 기초로 만들어진 ‘동막골 사투리’가 대표적이다. 통상 시나리오를 기초로 사투리 번역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에 비해 <동막골>은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사투리 트레이너를 스페셜리스트로 두고 말 훈련을 거듭했다.

귀순한 북한 음악인 채수린과 강원도 사투리 개그로 독창적인 코미디를 선보였던 개그맨 심원철이 사투리 교사 역할을 했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다. 북한 사람이 등장하거나 북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에서 보여준 흉내내기 수준의 사투리가 아니라 언어를 통해 감정과 유머를 함께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말의 드라마’가 탄생한 것이다.

경계를 허문 무국적 휴머니즘

하지만 전쟁이라는 야만적 상황 속에 피어나는 인간애라는 도덕적으로 선한 의지만으로 독창적인 영화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동막골>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티 없고 무구한 상상력을 거의 그대로 실사로 옮겨놓은 것 같다. 이념과 국경을 초월한 평화주의, 반전사상, 인간애와 휴머니즘을 예찬하는 내용 뿐 아니라 만화적인 화면과 자연친화적 묘사도 이런 심증을 굳히게 만든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미야자키의 음악 파트너인 영화음악가 히사이시 조가 음악을 담당하기도 했다. <천공의 성 라퓨타> <하울의 움직이는 성> <소나티네> <키쿠지로의 여름> 등 수 많은 영화음악을 만든 히사이시는 박광현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면서 그의 음악을 들었을 정도로 영감을 제공한 장본인이었다.

그의 음악은 순박한 동막골 사람들과 전쟁으로 상처 입은 군인들이 이념의 벽을 넘어 하나가 되는 광경을 특유의 인간미 넘치는 선율로 잡아낸다. 하지만 만화의 커트 분할 방식을 거의 그대로 사용한 화면 구성, 미야자키 하야오 식 판타지 취향은 예정된 수순을 따라 흘러가는 드라마를 더욱 전형적으로 보이도록 만든다. 어디선가 본듯한 영상과 음악, 테마가 끊임없이 시신경을 자극하는 것이다.

<동막골>은 한편으로 시대적 배경이 뚜렷한 이야기지만 강퍅한 현실 세계를 꿈꿀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려는 의도가 곳곳에서 보여지는 판타지 영화다. 곶간에 수류탄이 터지자 팝콘 눈이 내린다든가, 착하기만 한 미친 소녀 여일의 눈에 보이는 나비, 동막골을 굽어보는 듯한 웃는 모습의 벌통 등 환상적인 장면들이 많다. 거대한 멧돼지와 마을 주민들과의 한 판 승부, 하늘거리는 나비, 공습을 가하는 폭격기를 창조한 CG도 이들 장면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옴니버스 영화 <묻지마 패밀리>에서 가장 돋보였던 <내 나이키>를 연출하고 CF 연출자로 이름을 떨친 신인 감독 박광현의 재주가 큰 몫을 했음은 물론이다. 최민식이 ‘거칠은(거친) 벌판으로 달려가자’를 흥얼거리는 광고가 박광현의 작품.

최소한 박광현은 허다한 CF 출신 감독들이 반짝이는 영상 감각과 빈약한 드라마 감각을 확인시키며 명멸해갔던 과거의 전철을 되풀이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동막골>은 대단히 독창적이지는 않지만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 이야기를 포장할 줄 아는 영상 테크니션으로서의 자질을 고루 갖춘 기대할만한 신인의 출현을 예감케 한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5-08-11 18:49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