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이대근'으로 영화 바깥세상 보는 재미에 행복"


40년의 연기 인생 중 장장 30년을 주연으로 한국영화와 동고동락한 배우 이대근. 출연 작품 300여 편, 액션 스타ㆍ섹스심벌ㆍ코믹 연기 등 시대를 관통하는 캐릭터로 변신을 거듭해 온 연기로 인해 ‘배우 이대근’에 대한 팬들의 기억은 세대마다 제 각각이다.

그의 연기는 그만큼 폭 넓고 선이 굵다. 혹자는 그를 가리켜 김승호의 뒤를 잇는 ‘큰 배우’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8월 24일 시내 한 호텔 커피숍에서 잠시 무대에서 내려온 ‘인간 이대근’을 만났다.

우선 60대 중반이란 나이가 믿기지 않는 다부진 몸매에서 풍기는 단단함은 그가 얼마나 자기관리에 철저한 배우인지 말해준다. 부리부리한 눈과 야무진 입매, 단호한 음성과 힘있는 제스처는 ‘배우 이대근’ 하면 떠올리는 ‘남자다움’을 물씬 풍긴다.

자리를 잡자 그는 ‘배우랍시고 티 내는 건 딱 질색’이지만 요 며칠 눈에 탈이나 선글라스를 끼고 있을 수밖에 없다며 양해부터 구한다.

요즘 그는 활동이 뜸한 틈을 이용해 오랜만에 영화판 바깥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진짜 세상 구경을 하고 있다며 근황을 전한다. “영화를 할 때는 몰랐어요.

무대에서 내려와 스타 계급장 떼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니 신기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에요.” 물건 값 하나 제대로 모르는 30년 주연급 스타에게 영화를 떠난 일상이 낯설기도 할 터이다. 그는 “가만히 지나가는 행인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고, 길가에 핀 평범한 들꽃들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 새삼 깨닫는다”며 한창 때에서 조금 비켜난 삶을 이제야 무척 즐긴다고 말한다.

그는 “스타란 시대가 붙여준 이름에 불과하다”며 ‘잘 나가던’ 시절을 회상하듯 털어놓는다. 그가 보기에 인기는 명예와는 다르다. 명예로운 배우의 길은 끊임없이 홀로 노력하는 동사형 삶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대뜸 “난 미친 사람처럼 살았어요”라고 잘라 말한다. “원래 성격이 그래요. 한가지를 하면 다른 건 생각 안 합니다.” 영화에 미쳐 작품만 생각하고 40년 가까이 영화인으로 살아왔다. 과거 차지철 역을 맡았을 땐 차지철 집 식모까지 만나보고 인물 탐구를 했다.

필름을 돌리듯 풀어내는 그의 영화 인생 이야기는 자신도 헷갈릴 만큼 길고 다채롭다. 300편이 넘는 엄청난 다작에 숱한 히트 작은 조그만 영화 박물관을 차려도 될 성 싶다.

사실 그는 서라벌예대를 나와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시작했지만 ‘연극배우 이대근’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하지만 그 당시 인기가 꽤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흥행발’을 타고 난 배우인 셈이다. 극단 민예의 ‘고려인 떡쇠’, 극단 성좌의 ‘노틀담의 꼽추’ 는 그가 초연한 작품들이다.

이들 공연 땐 국립극장이 터져나갈 정도로 흥행 몰이를 했었다고 한다. 이후 1967년 KBS 탤런트 7기로 입사해 활동하다 당시 탤런트로는 드물게 최무룡 감독ㆍ주연의 ‘제3지대’에서 영화인으로 변신했다.

그가 주인공으로 발탁된 첫 영화는 신상옥 감독의 ‘김두한’이었다. ‘김두한’은 5편까지 제작됐는데 모두 주연을 맡았다. 이후 ‘히라소니 1, 2편’ ‘거지왕 김춘삼’ ‘사나이들’ 등 한국영화 황금기를 장식했던 액션 영화에 주연급으로 출연하면서 황해, 장동익, 박노식 등을 잇는 ‘2세대 액션 스타’로 컸다.

그의 출연작 300여 편 중 150편 이상이 액션물이었고, 지금도 찢어지고 까지면서 온 몸으로 찍었던 그 당시 액션 영화들에 애착이 크다.

연기에서 둘째 가라면 섭섭해 할 이대근이지만 액션 연기에선 선배 박노식을 최고로 친다. 자신도 기계체조, 복싱, 레슬링 등 안 해본 운동 없이 ‘한 가닥’ 하는 솜씨였지만 그래도 박 선배 다음이란 얘기다.

액션 장면은 대개 10초에 13합(한 차례의 주먹 교환이 1합)이 왔다 갔다 해야 하는 보통 빠르지 않고선 하기 힘든 연기인데, 복싱을 한 박노식의 주먹은 빠르면서도 멋지게 끊어 치는 것이 감히 넘볼 수 없는 경지였다고 회상한다.

그가 ‘협객’으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엔 1년에 17편까지도 찍었다. 쿼터제로 연간 한국영화 의무제작편수가 정해져 연말에 마감시간에 쫓기면 정말 죽기 살기로 찍었다. 영화계의 ‘마감시간 지키기’였던 것이다. 이제 나이가 드니 영화에 대한 열정 하나로 버텨냈던 그 시절이 무척 그립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 때 영화판은 감독이나 배우나 돈보다 의리가 앞섰다. 그래서인지 그는 지금도 영화계 인사들을 가리켜 ‘식구’라는 표현을 곧잘 쓴다.

최근 배우들의 출연료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서 그는 “시대가 달라져 생기는 현상”이지만 정작 문제는 ‘강호’에 의리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세태라며 목청을 돋운다. ‘사나이 이대근’의 눈에는 요즘 세상이 이만 저만 예(禮)가 무너진 게 아닌 것이다.

세태 이야기의 열기가 ‘섹스심벌’로 오해(?) 받게 된 ‘감자’ ‘뽕’ ‘변강쇠전’ 등 향토문학작품 영화 이야기로 이어지자 그는 ‘80년대 섹스심벌 이대근’에 대한 인식이 못마땅하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60을 훌쩍 넘긴 배우로서 자신의 영화 인생을 제대로 정리하고 싶은 듯, 특히 ‘감자’ ‘뽕’은 우리나라의 훌륭한 단편문학을 영화화 한 것으로 결코 ‘에로 영화’로 볼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자신은 그 영화들에서 “벗은 연기 한 번 한적이 없다”고 억울해 한다.

또 ‘변강쇠전’(감독 엄종선)만 하더라도 유교문화 아래 억눌려 살던 서자(변강쇠)와 과부(옹녀)의 한을 해학적으로 다룬 훌륭한 향토예술이라는 것이다.

그는 특히 “변강쇠가 억압적 제도의 상징인 사또와 밤새 싸우다 아침에 보니 그게 정승이어서 도끼로 패서 옹녀와 아이들 자는 방에 장작으로 때버리는 장면은 저항을 상징한다고 해서 당시 감독이 당국에 불려가 혹독한 검열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의 주장대로 배우 이대근은 ‘감자’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심봤다’ 등 향토문학 영화로 80년대 대종상ㆍ백상예술대상을 휩쓸며 예술배우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자연히 당시를 풍미했던 유명 여배우들 이야기로 이어진다. 당시 유명 여배우들 치고 그와 호흡을 맞춰 보지 않은 배우는 드물다. 어떤 여배우와 제일 잘 맞았느냐고 묻자 그는 한참 머뭇거리더니 “역시 남자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배우는 미모보다 마음씨”라며 자신이 보기엔 정윤희 씨가 가장 착한 여배우였다고.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20여 년 전 ‘빛을 마셔라’ 등 기독교 간증 작품이 인연이 돼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셰익스피어 희곡이 최고인 줄만 알았던 그에게 성경은 연기와 세상에 새로운 눈을 뜨게 했다. 한참 이어지는 그의 종교 이야기는 배우 이대근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했다. 그는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만든 ‘벤허’ 는 지금 봐도 기가 찬 작품이라고 칭찬한다.

그는 서울 토박이다. 이대근(李大根)이란 이름은 본명이다. 부친은 대한청년단 간부로 해방공간에서 정치 활동을 했다. 부인 최용옥 씨는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학 박사로 농림부 장관을 지낸 김도현 박사의 외손녀다.

그는 특히 영화계에서 자식농사를 잘 지은 배우로 꼽힌다. 큰 딸, 둘째 딸은 모두 약학 박사로 첫째는 미국식품의약국(FDA)에 근무하고 있고 둘째는 교사다. 부인과 두 딸은 지금 미국에 거주하고 있어 서울서 홀아비로 지내며 미국은 옆 동네 다녀오듯 들락거린다.

그는 지금 새로운 영화 ‘이대근, 이댁은’(심광진 감독)을 준비 중이다. 노인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특이한 제목을 보면 아마 이대근의 굵직한 연기력에 기대어 기획된 영화라는 느낌을 받는다. 가을에 촬영에 들어가 내년에 개봉될 예정이다. 배우 이대근의 새로운 연기 변신이 사뭇 궁금해진다.


조신 차장


입력시간 : 2005-08-30 16:52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