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자 손대지마" 애인지키기 대소동

류승범이 다시 야수가 됐다. 전작 <주먹이 운다>에서 독기를 품고 링 위를 누비는 야수 같은 복서를 연기했던 그는 <야수와 미녀>에서는 흉한 외모 만으로 다시 한 번 야수가 된다.

충무로 배우들은 '쎈 영화'에 출연한 다음 몸풀기 용으로 가벼운 코미디나 멜로 영화를 택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선례를 류승범도 따르게 된 셈이다.

쌈짱(<품행제로>)이나 문제아(<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주먹이 운다>)를 연기할 때 류승범은 물 만난 고기마냥 활기찼지만,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 진력하는 이런 무구한 청년 역에도 썩 잘 어울린다는 걸 증명한다.

<야수와 미녀>는 이 같은 배우 류승범의 매력에 십분 의지하려 한다. 류승범을 축으로 해 만들어진 이 영화는 미녀와 야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로맨틱 코미디다.

야수와 미녀 사이

용감한 자는 정말 미인을 얻는가. '못 생긴 게 맛은 좋아'라는 말은 지금도 진실인가. 외모 중심주의가 판을 요즘 세태를 사는 우리 시대의 야수들이 품었음직한 의문이다. 상황은 변해도 많이 변했다. 돈 많고 학벌 좋고 잘 생기고 매너까지 좋은 인간들이 '야수'의 영역까지 침범한 지는 이미 오래다.

<야수와 미녀>는 외모 콤플렉스에 빠진 한 순진무구한 청년의 좌충우돌 애인 지키기 소동극이다. 우주 괴물 목소리 더빙에 천재적인 케이블 만화 채널 성우 구동건(류승범)은 시각 장애인 여자 친구 해주(신민아)에게 헌신적으로 애정을 쏟는다.

앞을 보지 못하는 해주에게 사실과 다르게 꽃미남으로 자신을 각인시킨 동건에게 걱정이 하나 생겼다. 안구 이식을 통해 해주가 개안을 하게 된 것이다.

자나깨나 남자친구의 수려한 얼굴을 보기 위해 눈 뜰 날만을 학수고대해 온 해주에게 '야수'의 얼굴이 드러날까 걱정하는 동건은 신분을 위장하고 성형 수술까지 하지만 고교 동창이자 검사인 탁준하(김강우)의 등장으로 동건의 애인 지키기 전선에 이상이 생긴다.

문학과 만화, 영화 등을 통해 '미녀와 야수'만큼 반복된 이야기는 없다. 외모는 보잘 것 없지만 무던하고 충직한 야수가 마침내 미녀의 사랑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는 많은 야수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신화였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제목은 <미녀와 야수>가 아닌 <야수와 미녀>다. 야수가 미녀를 얻는 이야기가 아니라 미녀가 야수를 얻는 이야기인 셈이다.

야수는 심봉사처럼 눈을 뜬 미녀에게 흉한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미녀는 그런 야수를 되찾기 위해 노력한다.

<야수와 미녀>는 지극한 순정은 언젠가 보상을 받게 된다는 고리타분한 교훈극은 아니다. 그렇다고 미용과 성형 산업이 기형적으로 발달한 우리 사회의 외모 지상주의에 대해 일갈하는 비판적 코미디도 아니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사랑은 눈을 멀게 한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만나 연심을 키우고 사랑에 빠지는 세상의 모습은 통념적인 미추의 개념을 무색케 한다. <야수와 미녀>는 그 보편적 사랑의 법칙에 충실하다.

판타지와 현실의 애매한 타협

판타지와 현실의 애매한 타협 로맨틱 코미디의 전통적 미덕을 요즘 관객의 미각에 맞도록 어떻게 요리할까.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의 조감독을 거쳐 데뷔한 이계벽 감독의 고민은 그것이었다.

괴물 목소리 전문 성우와 시각 장애자의 아름답게 포장된 사랑을 풀어가는 <야수와 미녀>에서는 그런 부담감이 느껴진다. 사랑의 대상에 대한 헌신과 순정은 시공간을 초월한 감동을 끌어낼 수 있다는 걸 증명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런 영화에 지나친 의미 부여는 금물이다.

이계벽 감독은 "외모 지상주의를 다룰 생각은 전혀 없었고 우연히 내 뱉은 거짓말 한 마디가 일파만파로 번져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거짓말로 빚어진 소동극이라는 설정을 감안하더라도 우연과 작위의 흔적이 너무 두드러진다. 설상가상으로 꼬여가는 상황에 놓인 것은 구동건 만이 아니다.

점점 더 황당하게 변해가는 영화의 설정들도 마찬가지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거짓말처럼 영화는 억지 설정들이 이어진다. 정체가 탄로날까 두려워 하와이로 출장을 갔다고 하는 동건의 거짓말로부터 비화되는 사건들, 해주와 준하가 만나지 못하도록 스토커처럼 준하의 뒤를 좇는 동건, 비탈길에서 돌 실린 카트를 밀어 준하를 죽이려는 설정 등이 그렇다.

눈을 뜬 해주가 세상물정을 하나도 모르는 외계인처럼 묘사된 부분도 현실감이 떨어진다. 장님이었을 때가 눈을 떴을 때보다 더 행복하다는 <야수와 미녀>의 설정은 통념적인 미추 개념에 갇힌 세상의 아이러니를 슬쩍 건드린다.

그것을 뒤집으려는 이 영화의 의도는 좋았지만 인물과 상황들이 관객의 공감을 살만큼 충분히 농익지 않았다. 가수 윤종신이 연기하는 돌팔이 성형외과 의사, 준하를 미행하는 조폭 도식, 동건의 직장 동료로 출연하는 개그맨 안상태 등 재미를 위해 양념으로 들어간 인물들이 너무 많은 것도 흠이다.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런 영화에 쏟아지는 일반적인 비판은 어느 쪽 하나를 취사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색깔이 애매해질 수 있는 것이다.

<야수와 미녀>도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눈을 뜨기 전 해주의 상상을 묘사하는 판타지는 애인에게 자신의 실체가 드러날까 노심초사하는 동건의 소동극을 보여주는 현실과 밀착하지 못한다.

판타지 역시 현실의 구성 요소 중 하나라고 보아주기에도 영화의 묘사는 한참 모자란다. 좀 더 현실감을 강화하거나 비현실적 판타지로 밀어 부쳤다면 좋았을 것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