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한, 제2의 야구인생 '활짝'…빛난 투혼

역대 최고의 투수를 지낸 뒤 감독 데뷔 첫해에 팀을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려놓은 삼성의 선동열 감독은 시즌 중반 “당장 다른 팀에서 선수 한 명을 데리고 올 수 있다면 누구를 택하겠느냐”는 질문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롯데 손민한”을 꼽았다.

시즌 초반 돌풍을 일으키며 ‘부산 갈매기’들을 야구장으로 불러 모았던 롯데. 4년 연속 꼴찌의 불명예를 털어냈지만, 롯데는 지난 6월5일부터 12일까지 충격의 9연패를 당하며 “그럼 그렇지, 롯데가 뭘”이라는 비웃음을 들어야 했다. 이 때 9연패의 지긋지긋한 사슬을 끊어준 선수는 바로 손민한. 그는 또한 3차례나 4연패의 위기에서 팀을 구해냈다.

롯데 손민한에게 2005년은 평생 잊지 못할 한 해가 될 듯 싶다. 시즌 18승(7패) 방어율 2.46을 기록하며 다승왕과 방어율 1위 등 2관왕을 차지하며 일약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하더니, 시즌 후에는 이병규(LG) 오승환 등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생애 첫 정규리그 MVP 영광까지 안았다.

만년 하위 팀 롯데를 당당히 시즌 5위에 올려놓은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슬럼프를 딛고 일어서 제2의 야구인생을 꽃피운 투혼도 그의 MVP 수상에 한몫을 했다.

아마 시절 손민한은 자타공인 최고의 투수였다. 고교 시절 그는 부산고가 91,92년 화랑대기에서 2년 연속 우승하는데 일등공신이 됐다. 또한 고려대 재학 때는 국가대표 에이스로 활약하며 1994년 니카라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의 준우승을 이끌어냈다.

손민한은 1997년 계약금 5억원이라는 초특급 대우를 받고 롯데에 입단했다. 5억원은 2004년 김수화(5억3,000만원)가 들어올 때까지 7년간 깨지지 않은 롯데의 신인 계약금 최고액이었다.

하지만 아마 시절 눈부신 쾌투는 프로 무대를 밟자마자 부진과 부상이라는 부메랑으로 그에게 돌아왔다. 어깨를 지나치게 혹사당했기 때문이다.

입단과 함께 어깨 부상을 당한 손민한은 97년 10월에 선수 생명을 걸고 어깨 수술을 감행했다. 99년까지 3년간 이렇다 할 활약을 못 보인 그는 한숨 속에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의 활약을 기대했던 팬들과 구단 관계자들의 따가운 눈총에 손민한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그는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설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힘든 시기였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그리고 2000년. 고단한 재활 훈련을 거친 그에게 햇살이 비추기 시작했다. 예리한 변화구와 자로 잰듯한 제구력을 앞세워 12승(7패)을 올리며 명성을 되찾은 그는 그 해 시드니올림픽에 ‘야구 드림팀’ 멤버로 출전해 한국의 동메달 획득에 큰 역할을 했다.

기세가 오른 손민한은 2001년에 15승(6패)으로 다승 공동 1위에 올라 ‘갈매기 에이스’의 완벽한 부활을 알렸다. 그러나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부상이 다시 발목을 잡았고 감독과의 불화까지 겹친 손민한은 2002년 4승, 2003년 3승으로 다시 내리막길을 걸었다.

올 해로 30세. 손민한은 완전히 달라졌다. 힘으로 윽박지르기 보다는 머리를 쓰는 노련한 피칭을 이어갔다. 특히 영리한 수싸움과 타자의 혼을 빼 놓는 절묘한 체인지업을 앞세워 최고의 투수로 거듭났다.

18승. 1999년 정민태(현대) 이후 6년 만에 ‘20승 투수의 주인공’라는 타이틀을 노릴 만도 했다. 그러나 그는 20승 문턱에서 내년 시즌을 위해 후반기 몇 경기를 과감하게 포기했다.

MVP 시상식장에서 “MVP보다는 우승 반지가 더 가지고 싶다”고 말한 손민한. 올 해 화려하게 부활한 그가 과연 내년에도 롯데의 마운드를 이끌며 우승 반지를 낄 수 있을 지 주목된다.

오승환, 마운드의 철가면…포스트 SUN을 꿈꾸다

“이제 시작입니다.”

두산과의 한국시리즈 4차전 9회말 투아웃에 삼성의 우승을 확정짓는 마지막 투구를 던진 오승환의 말이다. 불과 10분 전에 우승을 차지하고 시리즈 MVP까지 거머쥔 선수가 하는 말치고는 지나치게 냉정하다.

돌부처, 포커페이스. 오승환의 별명 그대로였다. 새내기 오승환이 올 시즌 삼성의 뒷문을 배짱 두둑하게 책임지는 철벽 마무리로 맹활약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바로 이 냉정함이었다.

오승환의 고교 시절 포지션은 외야수. 고3시절 그는 어느 고교 대회에서 1번 타자 겸 외야수로 출전해 만루홈런을 포함해 혼자 5타점을 기록, 팀 승리를 견인한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정민철(당시 요리우리 자이언츠) 선배 같은 힘과 기교를 갖춘 투수가 되고 싶습니다.” 불방망이를 휘두른 선수의 소감치곤 약간 어색한 말이지만 당시 그의 모자에 새겨진 ‘147km’와 ‘대표팀’이란 문구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오승환은 그렇게 고교 때부터 투수의 꿈을 불태워 왔다.

한서고 1학년 때 그는 140km의 강속구를 뿌리는 유망주였다. 메이저리그로부터 공개테스트를 제의 받았을 정도. 하지만 그는 허리부상을 당해 투수로서의 선수생활에 위기를 맞게 된다. 이후 경기고로 전학한 그는 주로 1번과 외야수를 맡다가 프로의 부름을 받지 못하고 단국대에 들어갔다.

단국대 강문길 감독과의 만남은 오승환의 야구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된다. 투수로서의 재능을 아까워한 강 감독은 ‘타자 오승환’에 대해서는 애써 눈감은 채 ‘투수 오승환’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오승환은 1학년 때 투수로서 치명적인 팔꿈치 수술을 받았지만 강 감독은 제자의 의지와 집념을 꺾지 않았다.

2년간의 피나는 재활이 있었고 오승환은 마침내 다시 마운드에 설 수 있었다. 3학년 때 마운드에 복귀한 오승환은 그 해에 2승3패 방어율 1.46의 호성적으로 부활의 가능성을 보인 뒤 이듬해 기적처럼 우뚝 일어 섰다.

춘계리그와 종합선수권에서 5승1패 방어율 1.58의 성적으로 신데렐라의 출현을 예고하더니 추계리그에서는 3승 무패 방어율 1.45, 탈삼진 46개의 놀라운 기록으로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특히 춘ㆍ추계리그에서 혼자 6승을 거두며 단국대의 양대 리그 동시 석권을 견인, 일약 대학 무대의 에이스로 발돋움했다. 이후 오승환의 모자에는 ‘나는 행복하다’라는 또 다른 문구가 새겨졌다.

승률 1위(9할9리), 탈삼진 5위(115개), 세이브 6위(16세이브), 홀드 9위(11홀드). 신인왕을 거머쥔 오승환의 2005년 정규시즌 기록이다. 1승1무에 방어율 0, 탈삼진 11개. 오승환의 한국시리즈 성적표다.

지금도 일부 팬들은 오승환의 신인왕ㆍ한국시리즈MVP 석권에 못 마땅해 한다. 선동열 감독이 오승환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보내는 바람에 오승환에 대한 평가가 실제보다 과대포장 됐다며 눈을 흘긴다.

하지만 기록은 정직한 법이다. 10승 11홀드 16세이브. 오승환은 투수 세 부문에서 두 자리수를 기록하며 이른바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혹자는 ‘족보에도 없는’ 기록이라며 비아냥 댄다.

하지만 통상 프로야구에서는 2개의 세이브와 홀드를 1승으로 환산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23.5승을 거둔 오승환의 팀 공헌도는 8개 구단 모든 투수를 통틀어 최고를 자랑한다.

오승환은 또한 삼성 우승의 최대 고비였던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2-2로 팽팽히 맞선 10회말 무사 1,2루에 등판해 세 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워 팀이 4연승으로 우승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선동열 감독으로부터 “선수 시절 나보다 낫다”는 극찬을 받았던 오승환이 내년 시즌에도 2년차 징크스 없이 특급 투수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지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볼 일이다.

-손민한 오승환 시즌 성적-

손민한(연봉 1억8,000만원)

다승 18승(1위)

방어율 2.46(1위)

승률 0.720(3위)

탈삼진 105개(10위)

오승환(연봉 2,000만원)

승률 0.909(1위)

다승 10승(12위)

세이브 16세(6위)

홀드 11개(9위)

탈삼진 115(5위)




김일환기자 kevi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