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혹한 슬래셔 무비

‘유통업계 30대 상무, 이동통신사 최연소 사업본부장, 에너지 업계 최연소 CEO’. 신문 헤드라인에 종종 등장하는 매력적인 타이틀들이다.

이들의 속도위반 성공스토리를 보면 왠지 연차대로 승진을 하던 ‘구닥다리’ 같은 통념이 깨지고 진정 우리 사회가 능력 본위의 ‘쿨’한 사회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한 편으로는 문득 이런 의문도 든다.

과연 우리 사회는 자식 뻘 되는 나이 어린 상사를 자연스럽게 보스로 대할 수 있는 ‘비지니스 스킬 적인 쿨함’이 있을까. 더더군다나 어린 상사가 구조조정이라는 매정한 기업 논리를 기업 경쟁력이라고 믿고 있는 냉혈한이라면.

그나마 우리보다 나이에 비교적 연연해 하지 않는 듯한 미국사회에서도 새파랗게 어린 상사는 꽤나 달갑지 않은 존재인 모양이다. 적어도 영화 ‘인 굿 컴퍼니’에서 보여지는 미국기업에서는 말이다.

영화 ‘인 굿 컴퍼니’는 인수와 합병으로 껄끄러운 인력 재배치가 감행되는 미국 기업을 그리고 있다. 혹자가 기업형 슬래셔 무비(기업에서 벌어지는 피튀기는 살육전을 다룬 공포영화)라고 과장적으로 평한 이 영화 안에는 구조조정으로 난도질 당하는 미국형 사오정(45년 정년)세대들의 애환과 매서운 감원의 칼날을 피했지만 새파랗게 젊은 상사를 모셔야 하는 퇴물 간부의 고충이 담겨 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영화를 만든 감독이 바로 코미디 영화 ‘아메리칸 파이’나 ‘어바웃 어 보이’를 만든 전력이 있다는 사실. 감독은 나이 어린 상사가 부임하면서 벌어지는 별 이야기 거리도 되지 않는 해프닝에서 적절한 위트와 감동을 잘 버무려 내고 있다.

거대한 미디어 재벌이 출판사를 인수하면서 졸지에 광고부 총책임자 자리에서 쫓겨난 50대 간부 댄 포먼. 광고 세일즈(잡지에 실을 기업 광고를 따오는 일)의 ABC도 모르는 생 ‘초짜’를 보스로 대해야 하는 그로서는 이만저만 열받는 일이 아니다.

설상가상 동고동락하던 부하직원까지 감원이 된다. 하지만 댄은 아내가 늦둥이를 갖게 되고 딸 아이가 학비와 생활비가 비싼 뉴욕대에 편입하면서 직장에서 웬만하면 복지부동해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애비의 고충도 모르고 철부지 딸은 초짜 철부지 보스와 사랑에 빠져버리고 잡지사 광고 세일즈 일은 인터넷과 TV광고 시장에 밀려 점점 힘에 부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영화는 50대 간부의 노익장에 열렬한 성원을 보내며 그나마 따뜻하고 인간적인 사회를 제시하고자 한다. 결국 댄은 복직되고 가정은 다시금 평화를 되찾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업형 슬래셔 무비는 사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뉴스 코퍼레이션 CEO 루퍼트 머독을 연상시키는 영화 속 회장이 댄의 잡지를 다른 기업에 팔아먹으면서 댄은 복직을 하게 되지만 이미 사양산업에 접어든 잡지사는 전과 같은 궤도에 오르기 어려울 것이다.

인터넷 광고 시장의 급부상으로 댄이 맡고 있는 잡지 광고 세일즈는 점점 도태될 수 밖에 없고 결국 잡지사도 인터넷 사업을 새로 시작해야 하는 시장 압박을 받게 된다.

복직한 댄은 인터넷 광고 세일즈 총책임을 맡을 새로운 상사를 맞이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만큼 급속도로 변화하는 비즈니스 환경에서 노익장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인 셈.

또한, 영화 속 잡지 ‘아메리카 스포츠’가 소유권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꽤나 현실적인 묘사다. 얼마전 미국의 대표적 대안 언론 잡지 ‘빌리스 보이스’가 무가지를 발행하는 뉴타임 미디어와 합병을 했다는 발표가 있었다.

합병을 통해 빌리스 보이스는 전국적인 광고시장을 확보하고 온라인 사이트를 강화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1985년 루퍼트 머독이 기업인 레오나르도 스턴에게 팔아버렸던 ‘빌리스 보이스’. 결국 주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대신 생존을 택한 잡지사의 운명을 지켜보면서 지금 이 순간에서도 지구촌 한 구석에서는 냉혹한 기업형 슬래셔 무비가 아무렇지도 않게 진행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인 굿 컴퍼니’, ‘좋은 회사’는 결국 영화 속 환상일 뿐인가.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