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극장용 성인영화, 한국 여성에 열린 성담론의 장 마련

“흐흐흐”, “어머, 미쳤어”

60대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아랫도리를 더듬는다. 할아버지는 탄성을 내지르고 둘은 몸을 포갠다. “사랑해 가즈코”. 중학교 시절 첫사랑을 만나 사랑을 나누는 노년 남녀의 모습을 영화는 가감없는 성적 묘사로 그렸다.

‘노인의 성(性)’을 다룬 이마오카 신지(今岡信二)의 영화 <황혼 – 몇 살이 되어도 남자와 여자(たそがれ-いくつになっても男と女)>의 한 장면, 이 장면이 은막을 흐르자 핑크영화제에 참석한 여성관객이 내뱉은 말이다.

5일 오후 서울 이수동 씨너스 상영관에서 여성 관객들 사이에 잠입(?)해 취재한 핑크영화제 풍경은 생각만큼 음침하지도 에로틱하지도 않았다. 손에 팝콘과 콜라를 들고 동성 친구와 영화관을 찾은 여성들은 영화의 키스 장면에서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과장 섞인 성애묘사가 나올때는 폭소를 터뜨리기도 하는 유쾌한 분위기다. “진짜 웃기다”, “뭐, 엉덩이라고”하는 대화가 관람석에서 오간다.

이 영화제는 올해가 2회째로 핑크영화로 불리는 일본의 극장용 성인영화를 상영하되 여성관객들만 참석할 수 있게 했다. 남성과 똑같이 성에 호기심이 있고, 이에 대한 사회적 담론에 관심이 많은, 여성만을 위한 영화제다.

■ 왜 '핑크영화'인가


원래 ‘색 있는 영화’로 불렸던 핑크영화 장르는, 1963년 영화평론가 고(故) 무라이 마코토가 <오 핑크영화>란 말을 사용하면서 이름을 얻었다. 일본에서 저예산 독립영화의 한 장르로 인정받고 있으며 전용영화관에서만 상영한다.

나름대로 핑크영화를 규정하는 기준도 있다. 일반적으로 핑크영화는 단순한 에로물이 아니며, 평균 3백만엔 내외의 예산으로 일주일내에 촬영을 마친다. 혼다 오사무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 소장에 따르면 “핑크영화란 남녀의 근원적인 애욕을 통해서 동시대의 사회상황을 반영하는 일본 특유의 예술영화”다.

핑크 영화의 위상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쉘 위 댄스?>를 만든 수오 마사유키 감독도 핑크영화 출신이다. 일본에서는 40억대 기성영화를 만드는 감독도 자신이 핑크영화 출신임을 당당하게 밝힌다.

<박치기>라는 영화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즈츠 카즈유키 감독 역시 핑크영화 출신이다.

이번달 28일까지 씨너스 이수, 오투(부산대), 대전, 이채(파주출판단지)에서 열리는 핑크영화제에서는 핑크영화계의 ‘사천왕’으로 불리는 사토 토시키, 사노 카즈히로, 제제 다카히사, 사토 히사야스의 <애욕온천>, <단지부인 옆집소리>, <가물치> 등의 작품을 상영한다.

이 영화제에는 예외적인 ‘커플 데이’를 제외하고는 여성관객만 입장이 가능하다.

■ 핑크, 한국사회에 외치다


작년 핑크영화제 좌석점유율은 80%에 이르렀다. 여성들은 왜 핑크영화에 열광할까.

남성과 같이 말초신경의 자극만 원하는 심리를 예상했다면 오산이다. <황혼> 상영관에서 만난 신 아무개(27.여)씨는 “특별히 성에 관심이 있어서 영화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라며 “아무데서나 볼 수 없고, 흔히 접할 수 없는 영화를 볼 수 있을 것 같아 찾아왔다”고 말했다. 이 아무개(27.여)씨는 “노인들도 사랑의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며 “재밌었다”고 촌평했다.

노년 여성의 반응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솔직함이 죄가 되는 분위기가 여전한 우리사회에서 성(性)에 대한 열린 담론을 영화를 통해 말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는 것이다. <황혼>을 관람한 63세의 한 여성은 “유교적 사회에서 말하기 어려운 성에 대한 주제를 다루는 영화에 관심이 있어 왔다”고 말했다.

한 60대 여성은 “우리 나이대와 같은 사람들의 성을 솔직하게 다룬 영화에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며 “처음 접해봤지만 앞으로 이런 기회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한 핑크영화 감독은 “일본에서조차 제한상영관에서만 상영하는 핑크영화를 한국의 멀티플렉스에서 상영하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며 한국의 문화 수준에 감탄했다.

주희(38.여) 씨너스 이사는 “영화제가 억압된 한국 여성의 성과 담론을 열린 공간에서 자유롭게 토론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며 핑크 영화제 기획의도를 설명했다.

핑크 영화의 색깔 있는 도전에 한국사회가 어떤 응전을 할지 주목된다.

■ 정상진 씨너스 이수 대표이사
"핑크영화는 예술영화의 한 장르"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밥먹고 출근하는 것과 똑같은 일상의 하나인 성을 이야기 과정에 넣은 것 뿐이다.”

핑크영화의 개념에 대한 정상진(40) 씨너스 이수 대표이사의 답이다. 5일 오후 서울 이수동 시너스 영화관에서 정 대표를 만나 핑크영화제를 비롯한 각종 영화제를 여는 이유와 계획을 물었다.

정 대표는 한눈에 보기에도 일반적인 사업가와는 다른 모습이다. 큰 키에 노타이 차림, 유행하는 머리모양과 뿔테안경이 영화배우나 감독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이력을 살피면 의문이 풀린다.

그는 대학에서 영화학을 전공한 거의 유일한 영화관장이다. 영화제를 놓고 침을 튀겨가며 말하는 모습은 단순히 수익창출 목적이 아닌 영화 그 자체에 대한 열정을 느끼게 한다. 영화관이 영화제를 주최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핑크영화는 포르노와는 다른 예술영화의 한 장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정 대표는 “포르노는 섹스가 주된 소재고 이를 보여주는데 불과한 반면, 핑크영화는 섹스신으로 영화를 끌고 가는 게 아니라, 섹스가 이야기 과정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말한다.

정 대표는 “관객의 50%가 어떤 영화를 볼지 미리 결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관에 온다”며 영화관이 하나의 매체로서 주말에 상영하는 영화의 대부분을 메이저영화만 독식하게 하는 것은 하나의 ‘직무 유기’라는 점을 강조한다.

다양성 영화에 대한 그의 관심은 다른 영화제 기획에서도 드러난다.정 대표는 11월 핑크영화제 이전에도 3월에 한국독립영화전, 4월에는 퀴어영화제, 5월에는 예술영화 감독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특별전을 벌였다.

그는 지역영화관 연합 상표인 시너스 간판을 달고 이수점, 남산 자동차 영화관인 EOE4점, 파주출판단지 내의 이채점을 운영하고 있다. 수익구조 역시 그의 ‘진정성’을 대변한다. 정 대표는“핑크영화제를 여는데 1억여원이 들었으며, 일본의 핑크영화 감독을 초청하는 데만 1천 500여만원이 들었다”며 “수익으로 따지면 적자”라고 말한다.

핑크영화를 ‘페미니즘’과 같은 정치적 의도로 이해하는 것은 오해라는 설명이다. 정 대표는 “60년대 히피문화가 알몸을 반체제 투쟁의 도구로 삼은 전통이 핑크영화에 녹아있으며 80~90년대에도 체제 저항적인 문화 게릴라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라면서도 “최근의 핑크영화는 인디영화의 한 장르로 여성의 삶에 대한 공감 없이는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여성만이 출입할 수 있게 한 것은 핑크영화제의 기획의도와 맞닿아 있다.

정 대표는 “성인영화의 관객은 대부분 중장층 남성이며 포커스가 안 맞춰진 스크린 등 열악한 환경에서 상영해 여성이 혼자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 사실이다”라며 “음지에만 있는 우리 사회의 왜곡된 성 인식과 일치한다”며 안타까워했다.

정 대표는 “핑크영화에서는 에로영화와 달리 조각같이 예쁜 남녀들만 출연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과 비슷한 뚱뚱한 사람, 노인도 출연해 사랑을 나눈다”며 “만들어진 성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바로 내 생활과 가까운 얘기에 여성들이 공감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정 대표는“밝고 건전한 분위기에서 거리낌 없이 성을 토론하는 문화가 정착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영화 전공자로서 후배들이 영화관에서 자신의 독립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역시 그의 영화관 운영 계획 가운데 하나다.



김청환기자 ch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