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애리수 배우와 막간 인기가수 병행노래부르다 오열 객석까지 눈물바다음반 발표 전부터 열광적 반응… '유행가 취입붐'도화선

1922년 ‘취성좌’ 단원이 된 이애리수는 배우로서는 <부활>의 주인공 카추샤로, 가수로서는 막간의 인기가수로 활동을 병행했다. 1928년 가을. 동방극단의 경기도 개성 공연은 중요한 모멘트다.

극단의 중요 멤버인 전수린과 왕평은 고려의 옛 도읍지 송도의 만월대에서 잡초가 무성하고 폐허가 된 궁궐의 잔해를 보며 망국의 비애와 떠돌이 악극단원으로서의 서글픔이 교차해 한동안 오열했다고 한다. 그날의 쓸쓸했던 심정은 한편의 대중가요로 이어졌다. 바로 명곡 <황성의 적>이다.

사실 이 노래를 최초로 부른 가수는 배우 신일선으로 알려져 있다. 나운규의 무성영화 '아리랑'에서 주인공 영희 역을 맡았던 여배우다. 서울 단성사 막간무대에서 처음 이 노래가 발표된 후에는 이애리수가 이 곡을 전담해 불렀다고 전해진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당시 풍경. 그녀는 이 노래를 부르다 오열을 참지 못해 노래를 중단하는 사태가 벌어져 객석까지 눈물바다를 이뤘다고 한다. 이는 음반 발표 전부터 이미 <황성의 적>은 열광적 반응을 이끌어낸 히트곡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조선연극사로 극단을 옮긴 그녀는 사실 ‘황성의 적’ 발표 2년 전부터 활발하게 음반을 취입했다. 기록상 가장 앞서는 그녀의 공식 데뷔곡은 1930년 3월 빅터레코드에서 취입한 코믹송 ‘정숙이와 월성이’, ‘군밤타령’이다.

이외에도 그해 유행가 ‘강남제비’, 방랑가‘, ’사랑가‘ ’카페의 노래‘ 등 총 11곡을 이미 취입했다. 하지만 유행가요취입으로 재미를 보지 못한 빅터레코드의 사정으로 1931년 콤롬비아로 레코드사를 옮겼다. 이때 번안곡 ‘메리의 노래’, 유행가 ‘부활’, ‘실연’등 10여개의 음반을 취입하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빅타 레코드의 문화부장 이기세와의 만남은 중요하다. 1931년 조선유행가 취입을 포기했던 회사를 설득한 그는 절치부심의 마음으로 가수헌팅에 나섰다.

한 혼인식 피로연에서 이애리수의 구슬픈 노래에 감격해 음반 취입을 제안해 1932년 빅터레코드로 돌아왔다. <이국의 하늘>과 함께 발표한 <황성의 적>은 빅터로 돌아온 후 발표한 7번째 곡이다.

이 음반은 당시로서는 놀랍게도 5만장이 팔려나갔다고 한다. 확인할 수는 없는 음반 판매량이지만 이에 탄력을 받아 '유행가 취입 붐'이 일어났던 것은 사실이다. 이후 이기세의 집에는 새벽까지 가수데뷔를 꿈꾸는 지망생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삼천리' 1936년 11월호의 "명가수를 어떻게 발견하였던가"의 기사에 나오는 대목이다.

탄력을 받은 이애리수는 이후 1933년 6월까지 매달 3-4곡을 취입하는 최 절정기를 맞이한다. 일본으로 진출해 '李アリス(리아리스)'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벌였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32년부터 33년까지 그녀가 발표한 곡은 ‘변조 아리랑’, ‘봄비’ ‘순정’등 총 30곡에 달한다.

'별건곤(別乾坤)' 1933년 2월호는 인기 절정의 가수 이애리수와 연희전문 학생이자 유부남 배동필이 1월 9일 서울 봉익동 자택에서 음독 동반 자살을 시도했다는 충격적인 보도를 했다.

배씨 부친의 결혼반대가 단호했던 것. 그 해 6월에 ‘버리지 말아요’란 노래까지 취입한 후 결국 허락받아냈다. 이후 이애리수는 1934년 3월 <꽃각시 설움>을 마지막으로 음악활동을 완전히 정리했다.

흥미로운 기사가 있다. '삼천리' 1935년 10월호는 여가수 인기투표에서 1위 왕수복(1903표), 2위 선우일선(1166표), 3위 이난영(873표)에 이어 이애리수를 7위(309표)로 보도했다. 활동을 접었지만 그녀의 인기가 여전했음을 입증하는 증거다.

이애리수는 70여 년 동안 한 남자의 아내로 9남매의 어머니로만 살아왔다. 그녀의 장남조차 어머니가 ‘황성옛터’로 유명했던 가수였음을 대학시절에서야 알았을 정도라 한다. 현재 불후의 명곡 '황성옛터'의 노래비는 작사가 왕평(본명 이응호)의 고향인 경북 영천 조양공원에 세워져 있다.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