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회귀의 사랑반복되는 사건·대사를 순환 구조에 맞춰 영화적으로 이끌어

사랑은 어쩌면 국어대사전보다 많은 뜻과 정의를 갖고 있는 낱말일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얼굴을 가진 것처럼 각자 다른 사랑의 감정과 연애의 서사를 개인의 일기 속에 기록해왔다. 대가의 산문집에 사랑에 관한 짧은 경구가 첨가되지 않은 작품은 도서관에 세계문학전집이 비치되지 않은 경우만큼 보기 드물다.

동일한 모국어를 사용하고 같은 국어사전을 사용하는 작가이지만 사랑에 관한 정의만큼은 제각각이다. 만약 문학과 영화와 음악에서 사랑의 테마를 빼버린다면 김치 없는 한식 정식과 닮았거나 나무 없는 산을 등산하는 기분일 것이다.

한편으로 사랑을 소재로 한 영화는 ‘만나서 기뻤으나 헤어져서 슬프다’는 상투성에서 벗어난 작품이 드물다. 사랑은 두 사람의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를 뼈대로 하여 그 안에 누가, 어디서, 어떻게 만나서 왜 헤어졌는가를 서로 다른 색으로 칠하여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낸다.

홀리오 메뎀의 <북극의 연인들>은 유년시절에 만난 오토(펠레 마르티네즈 분)와 아나(나즈와 님리 분)의 운명적 사랑과 이별 그리고 재회를 보여준 멜로 영화다.

음악과 자로 잰 듯한 구도와 아름다운 자연은 이 영화의 품격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두 남녀의 평생에 걸친 운명적 사랑과 처음 장면으로 되돌아가는 순환 구조는 독특하지만 낯익은 서사 구조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독창성은 오토와 아나가 각자 주인공이 되어 동일한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감정의 색깔을 집어넣는 내레이션과 밀도 높은 정서를 만들어내는 서사 방식에서 빛을 발한다.

감독은 아나와 오토의 캐릭터에 대해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반복되는 사건과 반복되는 대사와 처음과 끝의 순환 구조를 영화적으로 잘 이끌고 가며 여기에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무리 없이 스크린에 이식하는 데 성공한다.

오토와 아나의 이름은 바르게 읽거나 뒤집어 읽거나 동일하다. 이들의 이름 조어법은 이 영화를 잘 설명해준다. 서로 닮은 이름처럼 이들은 운명적으로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이들은 성이 같은 형제처럼 오토의 아버지와 아나의 어머니가 부부가 되어 한 가족을 이루어 살아간다.

영화의 첫 장면은 오토가 황급히 아나에게 뛰어와 포옹을 하는 과정을 빠른 컷으로 쪼개어 붙였다. 마지막 장면은 처음 장면으로 되돌아 온 오토와 아나의 기억으로 복기(復棋)한다. 처음 장면이 마지막 장면에서 만나게 되는 순환구조를 이루어 이들의 이름 알파벳 모음처럼 앞과 뒤가 서로 맞물린다.

이 영화는 아나와 오토의 만남에서 헤어진 다음 다시 재회까지 이야기다. 서사의 상투성은 각자가 내레이터가 되어 그들의 감정을 시적인 언어로 내밀하게 설명하면서 극복된다.

처음 만남과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의 많은 것을 설명하고 상징한다. 처음 아나와 오토는 공이 매개가 되어 만나게 된다. 오토의 아버지는 “인생은 모두 시든다”고 말하며 자신의 이혼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오토는 그것을 거부한다. 그즈음 오토는 아나를 만난다.

오토는 인생의 단 한 개의 원을 그려가지만 끝을 맺지 못한다. 그 원은 아나와의 사랑이다. 그들의 사랑은 마지막 장면에서 살아남은 오토에게는 아직 미완이다. 아나는 아빠의 교통사고 소식을 알리려 학교에 찾아온 엄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과거로 내달린다. 거부하고 싶은 현실로부터 도망간 아나 앞에 오토가 공을 줍기 위해 왔다.

그녀에게 오토는 아빠를 닮지는 않았지만 “아빠가 보낸 메시지”로 이해된다. 아나에게 오토는 죽은 아빠의 대체물이며 아빠의 자리를 차지한 남자이므로 운명적이다. 아나가 오토를 만나는 방식은 현재 순간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과거로 내달리다가 만난 것이다. 이것은 의미심장하다.

니체는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어깨 위의 난장이를 내려놓고 두 갈래 길 앞에선 짜라투스투라의 선택을 갈파한다.

두 갈래 길은 ‘하나는 영원보다 오래 가는 길로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다른 하나는 또 하나의 영원으로서 미래로 향하는 길’이다. 아나는 오토와 만났을 때 아빠의 죽음을 부정하기 위해 과거로 뛰어가면서 아빠의 대체물로써 오토를 만난 것이다. 즉 첫 번째 길을 선택한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아나는 두 번째의 길을 선택한다. 아나는 오토를 북극에서 기다린다. 오토에 대한 그리움은 우편배달부에 대한 기다림이라는 행위로 나타난다.

오토가 화물기를 타고가다 오토 피로토(자동 조종)로 놓고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다 나무에 걸린다. 아나는 우편배달부로부터 스페인 화물기 추락 소식을 듣고 오토가 나무에 걸린 숲길을 지나 시내로 나간 다음 오토의 사고 소식이 실린 신문 들고 가다 교통사고를 당한다.

아나는 교통사고를 당한 후 그녀의 환상 속에서 화물기에서 탈출하여 돌아온 오토와 재회한다. 아나는 죽음에 편입되었지만 오토와 만남의 기억/환영으로 영원한 만남을 성취한다. 그녀는 만남의 기억을 상상하면서 영원의 시간이 지배하는 죽음으로 접어들어 오토와 공존하는 미래로 떠난 것이다.

오토는 아나가 시내로 향했다는 말을 듣고 뒤늦게 뒤따라간다. 그리고 오토는 차에 치여 거리에 쓰러진 아나와 재회한다. 아나의 죽음으로 오토는 아나와 사랑이라는 원을 완성하지 못하고 미완의 숙제를 떠안게 된다. 처음 장면은 오토와 만남이라는 환상의 기억으로 영원의 미래로 편입된 아나와 아나를 떠나보낸 오토의 현실적 기억이라는 두 개라 결합된 장면이다.

<아나 눈 속의 오토> 에피소드는 죽음이라는 영원의 세계에 편입되면서 오토를 자신의 눈 속에/기억 속에 각인하고 간 안나의 사랑의 완성을 보여준다. 아나는 죽음 직전의 기억 혹은 환상을 통해 오토와 만남을 이룩한 것이다.

오토는 현실에 살아남아 죽은 아나와 이별을 경험하고 그녀와 사랑의 원을 완결시키지 못한다. 이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은 자의 고유한 부채이다.

<북극의 연인들>은 엇갈림으로 인한 두 연인의 헤어짐이라는 비극을 보여준다. 하지만 오토와 아나의 서로 다른 기억과 환상으로 미래와 현재, 영원과 순간이라는 서로 다른 영역에 머무는 두 남녀의 감정을 보여주어 멜로영화의 상투성을 넘어선다.

시인 안도현은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 하나로 무장 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이라고 했다. 바르트는 늘 떠나는 철새형 연애보다, 떠나지 못하고 남은 자의 몫이 사랑이라고 했다. 오토는 그리움으로 가슴이 타는, 살아남은 자의 추억과 상처를 모두 상속받은 자이다.



문학산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