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반영한 다양한 실험·… 멜로·액션·판타지·호러 등 재창조

세계적 불황의 시대가 계절별 장르 트렌드마저 바꿔놓고 있다. 이제까지는 무덥고 불쾌지수가 높은 여름에는 한순간이나마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공포영화가 인기를 끌었다.

쌀쌀해지는 겨울에는 허전한 마음을 달래줄 따뜻한 휴머니즘 영화나 로맨틱 드라마가 관객의 발길을 붙잡았다. 이러한 대중의 취향이 영화 제작과 배급 시점까지 결정하는 것은 당연한 관례였다.

하지만 경제침체로 가라앉은 시대 분위기는 사람들에게 현실도피적인 판타지를 찾게 하고 있다. 현실과 닮은, 그래서 헛웃음을 자아내게 했던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들은 더 이상 소구력을 갖지 못한다. 이에 따라 판타지가 가미된 이색 소재의 드라마들이 계절에 관계없이 관객에 어필하고 있다.

주로 여름에 호러 코드와 결합되어 장르 매니아들을 매료시켰던 뱀파이어 소재의 작품들이 최근 각종 이슈를 만들어내며 특이한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다.

11월에 개봉한 <렛미인 Let me in>은 이상한 뱀파이어 영화다.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스웨덴영화인데다 ‘예술영화’로 분류된 부담에도 불구하고, 개봉 2주만에 관객 5만 명을 돌파하는 저력을 발휘하고 있다. 기대 밖의 인기로 이 영화는 처음에 13개였던 상영관을 33개로 늘리는 기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최근 미국 전역에서 신드롬을 일으킨 <트와일라잇 Twilight>은 한국에서도 개봉 첫주 박스오피스 2위를 달리며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시사회 때의 반응은 시큰둥했지만, 막상 개봉하니 예상 외로 호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편 미 남부 지방의 웨이트리스와 뱀파이어와의 사랑을 다룬 <트루 블러드 True Blood>는 내년 1월에 열리는 골든글로브 TV드라마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이 작품은 방영 반년 만에 <덱스터>, <하우스> 등 인기 드라마들과 수상을 다투게 돼 기대를 모으고 있다.

겨울용도 아니고 크리스마스용은 더더욱 아닌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뭘까. 뱀파이어와 평범한 인간의 사랑을 그리면서 기존 뱀파이어 캐릭터와 다른 현대적 뱀파이어의 모습을 보여주는 실험에서 그 인기의 비결이 발견되고 있다.

■ 공식 비틀고 깨는 새로운 뱀파이어들의 출현

왕따 소년과 뱀파이어 소녀의 순수한 사랑을 다룬 <렛미인>은 어떤 뱀파이어 영화의 스테레오 타입에도 속하지 않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랑한다. 뱀파이어가 등장하니 일단 ‘뱀파이어 영화’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성장영화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두 사람의 멜로가 전체적인 틀에서 더 강하다.

보통 남성 뱀파이어가 여성 희생자의 목을 빨며 발생하는 에로티시즘도 여기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흡혈 행위를 매개로 한 로맨틱한 사랑놀음도 없다. 시종일관 끈적한 감정으로 넘쳐나는 기존 뱀파이어 영화들과 거리를 둔 영화는 오히려 차갑고 건조한 시선으로 관객들의 가슴에 소름을 돋게 한다.

덕분에 별다른 기대를 않고 영화를 봤던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심지어 영화관계자들은 <렛미인>을 <다크나이트>와 함께 ‘올해의 영화’로 꼽기도 한다.

‘타임스’와 ‘버라이어티’ 등 해외 언론들도 ‘올해 가장 독창적이고 잘 만든 영화’로 <렛미인>을 평가했다. 벌써 할리우드에서의 리메이크가 결정된 것을 두고 ‘롤링스톤’지는 ‘할리우드가 이 영화를 망치기 전에 어서 보라’며 영화의 독창성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트와일라잇>에는 뱀파이어 영화의 유명한 규칙들을 무시해버리는 신세대 뱀파이어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인간의 피를 빨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으며, 낮에도 활동 가능하고, 결정적으로 인간에 적대적이지 않다. 그들이 햇빛을 꺼리는 이유는 햇빛을 받으면 소멸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보석처럼 온몸이 반짝반짝 빛나서 인간과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영화에서 뱀파이어는 더 이상 신의 저주를 담은 채 살아가는 불행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성스러운 느낌마저 들게 하는 ‘특별한’ 존재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할리퀸 로맨스 같은 캐릭터와 분위기들이다. 소녀는 뱀파이어 남자친구의 정체를 안 뒤에도 애정공세를 늦추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자신을 물어달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뱀파이어는 이를 거절하며 ‘그녀를 지켜주기 위해서’ 거리를 두려고 한다. 소녀 취향의 입맛에 맞는 판타지로서 <트와일라잇>이 여성 관객에게 폭발적인 반향을 얻을 수 있는 이유다.

이 영화에 열광하는 ‘트와일라잇 현상’의 뒤에는 탄탄한 원작소설이 자리잡고 있다. <트와일라잇>, <뉴 문>, <이클립스>, <브레이킹 던>으로 구성된 스테프니 메이어의 <트와일라잇 사가(Twilight Saga)>가 그것이다. J. K. 롤링의 <해리 포터> 시리즈 이후 가장 두터운 팬층을 자랑하는 이 시리즈는 이미 제작에 들어간 <뉴 문>의 훌륭한 소스가 되고 있다.

<트루 블러드>에서의 뱀파이어들은 아예 ‘커밍아웃’을 하고 인간과 공존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이 드라마에서 뱀파이어들은 일본에서 합성혈액음료 ‘트루 블러드’가 개발되면서 더 이상 인간의 피가 필요없게 됐다. 숨을 필요도 없어진 이들은 그래서 세상 밖으로 나와 본격적으로 인간들과 공존하게 된다.

드라마의 배경은 인종차별로 유명한 남부 루이지애나의 작은 시골마을. 아직까지도 차별이 남아 있는 이곳에서는 뱀파이어조차 차별의 대상이 된다. 여기서 ‘뱀파이어’라는 대사는 ‘흑인’이나 ‘동성애자’로 바꾸어 써도 의미가 통한다. 그래서 주인공 뱀파이어가 십자가가 보이는 단상에 올라 뱀파이어의 ‘인권’을 주장하는 장면은 고도의 사회풍자로 해석될 수 있다.

■ 뱀파이어 클리셰의 시작,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드라큘라’로 대표되는 고전 뱀파이어의 팬들은 이렇게 급속도로 시대에 적응하는(?) 뱀파이어들의 모습이 달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돌연변이’ 뱀파이어들 외에도 근래 등장한 ‘신세대’ 뱀파이어들은 햇빛이나 십자가, 마늘, 성수 등 기존 뱀파이어 퇴치법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뱀파이어들은 때론 인간들의 편에 서서 적들과 함께 싸우기도 한다. <블레이드>의 주인공 블레이드는 인간과 뱀파이어의 혼혈 뱀파이어로 양쪽 세계의 중간에 선 존재다. 때문에 뱀파이어로서의 약점도 거의 없는 상태. 이들에게 어설프게 십자가를 들이밀거나 성수를 뿌려대는 이들은 영화 초반에 죽기 십상이다.

최근 나오고 있는 거의 모든 뱀파이어 장르물에는 이러한 뱀파이어 클리셰(진부한 표현 혹은 생각없이 반복되는 규칙)에 대한 도전이 있다. 심지어 극중 인물의 입을 빌려 직접 뱀파이어 클리셰를 비웃기도 한다.

‘드라큘라’로 대표되는 뱀파이어 클리셰는 그 자체로 비현실적이다. 부유하고 로맨틱한 미남에, 귀족적이지만 어딘지 위험하고, 초자연적 힘과 감각을 지녔다. 게다가 빼놓을 수 없는 성적 마력 때문에 모든 여자들이 반하고야 만다. 그래서 뱀파이어 영화에서 여자들은 불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뱀파이어에게 자기 목을 내밀게 된다.

클리셰의 답습과 도전이 반복되는 까닭은 브람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에서 창조한 뱀파이어의 전형이 여전히 큰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브람 스토커가 <드라큘라>를 발표한 후 수많은 영화에서 드라큘라는 창백한 얼굴과 길고 뾰족한 송곳니, 음침한 지하의 관으로 대표되는 뱀파이어의 이미지를 재생산해왔다.

게다가 영화뿐만 아니라 드라마·뮤지컬·만화·게임 등 문화 전방위에서 오랫동안 활용되어 드라큘라의 이미지는 거의 절대적인 것으로 고착됐다. 그래서 현대에 등장하는 모든 뱀파이어들은 바로 이 고착된 이미지와의 싸움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설 <드라큘라>에 등장하는 드라큘라 백작은 15세기 왈라키아 왕국(루마니아 남부)의 잔인한 영주였던 블라드 체페슈 왕자를 모델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드라큘라’라는 이름도 그의 아버지가 받은 작위명 ‘드라큘(Dracul)’에 ‘아들’을 뜻하는 접미사가 붙은 데서 비롯됐다.

그의 냉혈한 이미지 역시 조국을 침략한 전쟁포로들을 잔인하게 처형한 것에서 유래한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드라큘라>(1992)에서는 인간 시절의 드라큘라가 적들의 몸을 긴 장대에 꽂아 인간 꼬치를 만들었던 장면을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신을 저주하다 흡혈과 불사의 저주를 받게 되는 과정에는 다양한 철학적 해석이 적용되면서 드라큘라의 이미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6- 언더월드
7- 박찬욱 감독의 '박쥐'
8- 블레이드
9- 토드 브라우닝 감독, 벨라 루고시 주연의 '드라큘라'
10- 반 헬싱

■ 시대에 따라 진화하는 뱀파이어

소설 속 드라큘라가 스크린에 처음 등장한 것은 독일의 프레데릭 W. 무르나우 감독이 찍은 <노스페라투: 공포의 교향곡>(1922)이다. 이 영화는 저작권 문제로 ‘드라큘라’라는 이름을 쓰지 못해 대신 ‘오를로크’ 백작이라는 이름으로 뱀파이어 캐릭터를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가장 익숙한 드라큘라의 모습은 미국에서 만들어진 토드 브라우닝 감독의 <드라큘라>(1931)일 것이다. 헝가리 출신의 벨라 루고시가 표현한 드라큘라의 모습은 이후 오랫동안 전형적인 드라큘라의 모습으로 반복되었다.

코폴라의 <드라큘라>(1992)는 헐벗고 굶주려 보였던 외모의 뱀파이어를 다시 우아하고 품위있게 되돌려 놓은 미적 완성품이라고 할 만하다. 브람 스토커의 소설에서 나타났던 ‘귀족 흡혈귀’의 이미지를 탐미적으로 재해석해 에로티시즘과 로맨티시즘을 불멸의 사랑으로 승화시켰다.

뱀파이어 캐릭터의 변화의 시작은 <뱀파이어와의 인터뷰>(1994). 이전까지의 ‘드라큘라’ 캐릭터가 고전적인 중년 뱀파이어에 머물러 있다면 여기서부터는 뱀파이어들의 성별과 연령대가 다양해진다.

물린 순간부터 불로불사의 삶을 살기에 영화 속 뱀파이어가 나타내는 것은 신의 저주와 사랑의 완성 따위가 아니라 ‘영원한 젊음’의 찬양이다. 하지만 동시에 어린 나이로 영겁의 삶을 살아야 하는 소녀 뱀파이어의 고뇌는 뱀파이어를 인간적인 존재로 다시 생각하게 했던 계기를 마련해줬다.

이후 등장한 일련의 뱀파이어 헌터 영화들은 인간 세계와 뱀파이어 세계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인물들을 다루며 뱀파이어를 인간 세계의 이질적 존재로 완전히 받아들인다.

여기서 뱀파이어란 사실상 이 사회의 소수자에 다름없는 존재다. 초기의 어둡고 무거운 이미지를 떨쳐내는 데 성공한 뱀파이어는 이제 멜로, 액션, 판타지, 호러 등 다양한 장르와 만나며 여전히 무궁무진한 대중적 소재로 재창조되고 있다.

◇ 황혼에서 새벽까지' (1996)

두 악동 로버트 로드리게즈와 쿠엔틴 타란티노가 만들어낸 장난기의 집대성. 뱀파이어물과 코미디를 합쳐 ‘코믹 호러’로 완성시켰다. 기존의 뱀파이어 규칙을 따라가되 심오한 철학이나 고민없이 뱀파이어들과 사투를 벌인다. 너무 심하게 변주한 탓에 뱀파이어물보다는 좀비물에 가까워 보인다.

◇ '버피와 뱀파이어' 시리즈(1997~2003)

여고생 뱀파이어 헌터의 삶과 사랑을 보여준 드라마. 당시로서는 건드리기 힘든 10대의 성적인 고민과 인간관계의 갈등까지 보여주면서 하이틴들의 공감을 자아냈다. 뱀파이어 사냥꾼임에도 불구하고 뱀파이어와 사랑에 빠지는 통속성을 10대의 감성에 맞게 그려냈다.

■ '블레이드' 시리즈(1998, 2002, 2004)

반 인간, 반 뱀파이어의 혼혈 뱀파이어가 등장해 악당 뱀파이어를 처단하는 영화. 하지만 인간보다 강하고 뱀파이어보다 더 강해진 탓에 주인공의 뱀파이어로서의 매력은 크게 떨어졌다. 그가 휘두르는 ‘정의의 칼질’에 맥없이 당하는 악당 뱀파이어들이 안쓰러울 정도.

◇ '언더월드' 시리즈(2003, 2006)

뱀파이어만으론 부족하다? 그래서 끌어온 것이 바로 늑대인간이다. 뱀파이어 집단과 늑대인간 집단의 갈등과 대립은 변종 늑대인간을 탄생시키고, 그와 뱀파이어 킬러가 사랑에 빠지면서 이야기는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흘러간다. 검은 가죽옷을 입고 공중에서 몸을 날리며 총을 쏘는 여전사의 모습은 <매트릭스>까지 연상시키며 장르 팬을 양산했다.

◇ '반 헬싱' (2004)

<드라큘라>의 반 헬싱 캐릭터에 늑대인간과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심지어 <엑스맨>의 ‘울버린’ 캐릭터까지 끌어들인 종합선물세트(초반에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하이드까지 등장한다). 덕분에 뱀파이어물로서의 매력은 반감됐다. 드라큘라의 복합적 성격보다는 ‘정의의 수호자’로서의 반 헬싱의 활약에 방점이 찍혔다.

◇ '박쥐' (2009)

박찬욱 감독이 3년만에 내놓은 신작. 한국영화에서는 독특한 뱀파이어라는 소재를 다뤄 2009년 상반기 개봉을 앞두고 화제를 모으고 있다. 존경받던 신부가 뜻하지 않게 뱀파이어가 된 후 친구의 아내와 사랑에 빠져 치명적인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