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적 흥행에 초점… 제작 현실과 제도개선 필요성 가려질까 우려

독립다큐멘터리 <워낭소리>(이충렬 감독)의 열풍이 거세다. 개봉 한 달을 겨우 넘어선 현재, 개봉관은 7개에서 120개 이상으로 늘어났고 70만이 넘는 관객이 이 영화를 보았다. 관계자들은 이대로라면 관객 100만 명을 돌파할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고 예상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개인 돈 1000만 원을 들여 완성한 독립장편 영화 <낮술>(노영석 감독)이 평단과 관객의 고른 지지를 얻으며 매우 순조로운 항해를 시작했고, 또 다른 독립장편영화인 <똥파리>(양익준 감독)가 얼마 전 로테르담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수상했다. 독립영화들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이렇게 뜨거웠던 적도 없다. 하물며 거의 언제나 독립영화가 추구하는 길과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해온 몇몇 정치인들까지도 자신들의 해괴한 맥락 안에서 <워낭소리>를 추켜세우기 바쁘다.

영화<워낭소리>, 영화<낮술>, 영화<똥파리>(왼쪽 부터)
그런데 이상하다. 정작 독립영화계 내부에서는 샴페인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지난 11일, 광화문 미디액트에서는 박정숙, 이충렬, 양익준, 안해룡, 문정현 감독과 고영재 한국독립영화협회 사무총장이 모여 '독립영화가 살아야 한국영화가 삽니다'라는 주제를 걸고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간단히 말해, 이들의 주장은 몇몇 독립영화들의 상업적인 성공이 독립영화제작 환경 전체의 현실로 오해되어서는 안 되며, 점점 더 열악해지는 독립영화 지원제도의 적극적인 개선방향이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4기 영화진흥위원회는 지난 2000년부터 영진위가 진행해온 독립영화 개봉지원 사업을 폐지했고, 아이러니하게도 <워낭소리>는 2008년 이 사업에서 4000만 원을 지원받은 마지막 영화로 2009년 최고의 화제작이 될 기회를 얻었다. 제작비와 마케팅비 규모가 작은 대부분의 독립영화들이 독립영화 전용관 인디스페이스를 비롯하여 몇몇 작은 극장들에서만 겨우 상영의 기회를 얻는 현실도 지적되어야 한다.

문제는 그뿐만 아니다. 고영재 사무총장의 말대로 독립영화 제작지원 예산은 몇 년째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으며, 심지어 '독립'이라는 단어에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보이는 영진위는 '독립'이라는 단어를 없애고 중편, 단편, 다큐멘터리, 다양성 영화, 저예산 영화 등으로 명칭을 바꾸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만 좋으면, 혹은 흥행만 하면 되지, 그깟 이름에 집착할 이유가 뭐가 있냐고, 오히려 만인이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 있는 표현이 좋지 않겠냐고 되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리 간단하게 받아들일 일이 아니다.

<워낭소리>와 <낮술>에 열광하는 대부분의 관객들과 평자들은 이 작품들이 '독립영화 같지 않다'는 데서 그 미덕을 찾는다. 기존의 독립영화들이 실험적이고 저항적이며 어둡고 무거운 경향으로 관객과의 소통을 등한시했다면, 이들은 그런 강박을 버림으로써 관객의 지지를 얻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물론 필자는 독립영화에 대한 애정을 유지하는 것과 독립영화 전반에 무조전적인 지지를 보내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위의 두 영화에 대한 찬탄이 독립영화에 대한 부정의 방식 속에서 이루어지는 상황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런 시선들은 이 영화들이 보편적인 주제로 보편적인 감성에 호소하기 때문에, 혹은 정치적인 이슈나 사회비판적인 목소리 대신 '비정치적인' 가치를 선택했기 때문에 그간의 독립영화들과는 확연히 다르며, 이러한 경향이야말로 미래의 독립영화, 아니, 저예산 영화가 성공할 수 있는 길이라는데 합의한다. 거대자본이 투입된 상업영화들의 무수한 실패 속에서 위의 영화들이 이룩한 성과는 분명 인정할 만한 것이지만, 이 영화들의 흥행을 둘러싼 거의 획일적인 반응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독립영화계의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나누는 건 늘 조심스러운 일임에도, <워낭소리>의 흥행을 둘러싸고 필자는 지금이야말로 그 경계에 대해 다시금 진중하게 생각해야 할 시기가 아닌지 묻고 싶은 것이다.

우선 위와 같은 반응에는 독립영화 전반의 다양한 성격을 하나의 경향으로 규정하고 분리시키는 몰이해가 전제한다. '독립'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서든 지우려는 영진위를 비롯한 다수의 견해는 검열과 자본(그것이 영화의 내용으로서 자본주의와 싸우는 방식이건, 제작과정의 실질적인 문제에서 상업영화들과 다른 길을 선택하는 방식이건 간에)으로부터의 독립을 사유하는 데서 창조활동을 시작하는 독립영화의 정체성과 역사를 부정하려는 의도를 내재한다.

또 하나의 우려는 이들의 흥행 성공이, 다시 말해 저예산 영화의 수익창출이 독립영화의 중심과제로 자리잡게 되는 현상이다.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독립영화가 막대한 제작비와 마케팅비로 무장한 상업영화들과 '평등한 입장'에서 경쟁할 위치에 올랐으므로 이제는 지원을 줄여도 무방하다고 보는 전혀 '공평하지 않은' 판단이다. 다른 하나는 독립영화의 흥행을 마다할 이유는 없지만, 그것이 앞으로 제작될 수많은 독립영화들의 유일한 제작기준이나 평가기준이 될 경우,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독립영화의 지반 자체가 시장의 메커니즘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편협해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독립영화인들의 기자회견 다음날,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 이들과 만나 제시한 나름의 대안이 모호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는 "지원에서는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고 "확실한 쪽을 밀어주는 게 낫다"는 견해를 피력했는데, 과연 누가, 어떤 기준으로 선정을 하며, '확실한 쪽'에 속하는 영화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확실하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결국 제도적 차원의 지원 확충과 함께 중요해지는 건 그 지원의 기준과 판단을 지지하거나 비판할 수 있는 독립적인 판단의 기준이 독립영화 내부에서도 끊임없이 논의되고 있는지의 문제다.

오랜 싸움 끝에 겨우 이룩한 성과가 하루아침에 저 멀리 후퇴하는 일이 지금 같은 시대에서는 비단 독립영화계의 문제만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독립영화인들은 <워낭소리>의 흥행에 함께 다행스러워하는 것과는 별개로, <워낭소리>의 환상에 빠져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위태로운 토대를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 방을 터뜨리는 영화를 찾아 모든 걸 거는 것보다, 여러 목소리가 어울리고 충돌하고 표현됨으로서 튼튼하게 성장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 일이 시급하다. 언론과 관객이 독립영화에 울리는 팡파레보다 위에서 언급한 독립영화인들의 날카로운 우려와 냉정한 대응이 더 절실한 건 그 때문이다.



남다은 영화평론가 namoo1978@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