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 하워드 감독정계 복귀·스타 MC 동상이몽 꿈꾸며 한 판 승부

론 하워드(Ron Howard) 감독의 <프로스트 vs 닉슨>은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다. 닉슨 대통령을 소재로 삼은 영화는 이전에도 있었다.

알란 파큘라(Alan J. Pakula) 감독의 <대통령의 사람들 All The President's Men>(1976년)과 올리버 스톤(Oliver Stone) 감독의 <닉슨 Nixon>(1995년)은 그 대표적인 예다.

알다시피 미국의 37대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Richard Milhous Nixon)은 미 대통령 가운데 유일하게 재임 중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임을 해야 했던 불행한 정치가였다.

그가 사임할 수밖에 없었던 표면적 이유를 다룬 영화가 바로 <대통령의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닉슨이라기보다는 당시 미궁에 빠질 뻔 했던 워터게이트 사건(Watergate Affair)을 취재하여 세상에 알린 워싱턴 포스트지 기자들인 칼 번스타인(Carl Bernstein)과 밥 우드워드(Bob Woodward) 두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영화의 내용도 두 기자의 활약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들은 어느 날 우연히 알게 된 한 절도사건이 모종의 정치적 음모와 연루되었다는 단서를 잡고 취재를 통해 그 사건의 실체를 밝혀내는데,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워터게이트 사건이었다. 닉슨은 TV 연설에서 "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라고 주장했지만, 변명에 불과했다. 결국 이 사건을 기화로 현직 대통령이었던 닉슨이 사임하게 된다는 얘기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닉슨>은 1974년 8월 9일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권좌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리처드 닉슨의 영광과 좌절을 그린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는 정사(正史)에 충실한 한 위인의 단순 나열식의 일대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예술적 허구'를 절묘하게 결합하여 공인(公人) 및 자연인으로서의 대통령 닉슨의 내면적 고뇌까지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요컨대 스톤 감독은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써 거짓말을 일삼는 닉슨의 부도덕성에 대해서 비판적 거리를 두는 한편, 그의 대통령직 사임을 전적으로 닉슨 자신의 책임으로만 돌리려는 기존의 윤리적 잣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부도덕한 정치인을 고발하려는 '전기적 영화'라기보다는 한 비운의 정치가를 두둔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론 하워드 감독은 <프로스트 vs 닉슨>에서 바로 닉슨의 사임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물론 그 이후 전직 대통령의 행보에 초점을 맞추었다기보다는 닉슨이 남겼던 인터뷰 내용을 영화적으로 재구성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인터뷰 내용이 중요한 이유는 닉슨이 사임을 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국민들에게 아무런 진실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한술 더 떠서 국민들에게 아무런 사과 표명도 하지 않았다.

일국의 대통령이 모종의 정치적 스캔들로 중도하차를 하는데 그냥 사임성명만을 발표하고 말았던 것이다. 의회에서 진행 중인 해임절차에 맞서 선수를 친 것이다. 게다가 그의 후임자인 포드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사면을 단행했다. 따라서 그를 법정에 세울 기회마저 영영 사라져 버렸다.

본 영화에서는 연기파 배우 프랭크 란젤라가 닉슨 역할을 맡았다. 영화가 시작되면 닉슨의 사임이 전 세계에 생방으로 중계되는데, 마침 이 장면을 시청하고 있던 한 사람이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그는 토크쇼 MC인 프로스트(마이클 쉰)인데, 우선 무엇보다도 엄청난 시청률이 그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프로스트는 곧 프로듀서인 버트에게 닉슨과의 인터뷰를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한다.

애초 버트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프로스트는 정치인과 인터뷰 경험이 없는 그야말로 연예전문 MC였기 때문이다. 거물정치인과의 인터뷰에 드는 사례비도 만만치 않았다.

다행스럽게 닉슨 측근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불명예스럽게 퇴진했다는 자괴감에 사로잡혀 있던 닉슨으로서는 정계로 복귀할 호기이자 앉아서 거액마저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대망의 인터뷰가 시작된다. 주어진 시간은 총 4일간이다. 첫째 날, 프로스트는 기선을 제압하려는 의도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화두(話頭)로 포문을 연다. 하지만 닉슨은 역시 노련한 정치가였다. 정치에는 문외한인 프로스트를 자유자재로 요리하면서 자기 페이스대로 인터뷰를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두 번째, 세 번째 날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인터뷰 내용은 닉슨에게 면죄부를 주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주어진 시간은 딱 하루. 이 마지막 승부에서 프로스트가 원하는 내용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그는 60만 달러라는 거액을 날리고, 그간 MC로 쌓아온 명성에도 치명타를 입게 된다.

프로스트가 닉슨으로부터 듣길 원했던 진실, 그것은 바로 온 국민이 듣고 싶어 했던 진실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바로 그 진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1977년 4월 '프로스트 대 닉슨'의 인터뷰가 방송 전파를 탔다. 닉슨이 사임한지 3년 만에 다시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당시까지 가장 많은 시청자가 TV 수상기 앞에 모였다고 한다. 4,50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과연 이 인터뷰를 계기로 닉슨은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가? 냉혹한 역사는 그렇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미 널리 알려진 내용을 영화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실황 생중계를 보는 듯한 긴박감에 빠져들게 된다. 닉슨의 역할을 맡은 프랭크 란젤라의 탁월한 연기력 덕분임은 물론이다.

그는 "대통령보다 더 대통령 같다"는 평가를 받았다. 인터뷰어로 나선 마이클 쉰(Michael Sheen)도 그에 못지않은 열연을 펼쳐 보인다. 그는 <더 퀸 The Queen>이라는 역시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에서 영국총리 역을 맡아 신선한 충격을 준 바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연출자인 론 하워드의 공력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분노의 역류>(1991년) <아폴로 13>(1995년) <뷰티풀 마인드>(2001년) <다빈치 코드>(2006년) 등 쟁쟁한 필모그래피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사족 하나, 정치가의 인생역정(人生歷程)을 다룬 영화는 언제나 흥미진진하지만, 그런 부도덕한 정치가를 현실에서 또 만난다면 무척 서글픈 일이 될 터이다.



김시무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