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명반·명곡] 1964년 신세기 레코드최희준·유주용·박형준·위키리 의기 투합미8군 출신 가수들의 국내 첫 노래동아리 팝·재즈풍 밝고 새로운 분위기로 60년대 대중 가요 부흥기 이끌어

70년대 '청개구리', '맷돌', '해바라기', '참새를 태운 잠수함'을 비롯해 서울대 '메아리'는 국내 음악동아리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이름들이다. 그렇다면 국내 최초의 음악동아리의 누구일까? 미8군 출신 가수들의 음악모임이었던 포 클로버스는 1963년에 결성된 국내 최초의 노래동아리다.

처음엔 보컬그룹결성을 염두에 두었지만 멤버들의 보컬 개성이 너무 강해 중창단결성에는 적합지 않아 노래모임을 결성해 의기투합했다.

독자적인 솔로활동으로 각자의 위치를 쌓은 멤버들은 63년 대한극장에서 열렸던 세계적인 가수 패티 페이지의 내한공연은 물론 외국의 유명가수들의 내한 때 마다 사실상 국가 대표가수의 역할을 수행했었다.

명문고, 대학출신의 엘리트가수라는 학벌프리미엄으로 유명세를 단 이 팀의 멤버는 서울대 법대 출신의 최희준, 서울대 문리대 출신의 유주용, 외국어대 출신의 박형준, 서라벌예대 출신의 위키리다. 미8군 가수들이 일반무대에 본격 진출한 1960년대 이전의 주류 대중음악은 트로트였다.

이들은 록을 도입한 신중현과 키보이스, 그리고 포크를 도입한 아리랑브라더스와 더불어 척박한 당대 대중음악계에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로 60년대를 대중가요의 부흥기를 이끈 선구자들이다.

포클로버스가 태동한 당시는 전쟁의 폐허에서 막 벗어나 경제재건의 열기가 뜨거웠다. '잘살아보자'는 희망의 꽃봉오리가 국민의 마음속에 몽실몽실 돋아나던 시절은 밝고 건강한 내용의 노래가 절실했다.

미8군 클럽을 주 무대로 활약한 이들은 작곡가 손석우, 김기웅과 함께 '건전한 홈 가요의 보급으로 대중가요를 발전시켜보자'는 야망아래 뭉쳤다. 노래모임의 이름을 '네 잎 클로버'란 뜻의 '포클로버스'로 정한 것은 희망에 대한 상징이었다.

노래동아리 포 클로버스는 2장의 음반을 남겼다. 신세기 레코드에서 발매된 1964년 '포 클로버스와 본본 사중창단'과 1967년 '별빛 속의 러브레터' 다. 이 음반들은 구하기 힘든 희귀음반일 뿐 아니라 당대 최고 수준의 음악성을 담보한 명반들이다.

1집은 60년대를 남성사중창단시대로 이끌었던 봉봉사중창단의 데뷔음반이기도 하다. 총 12곡이 수록된 이 음반의 타이틀곡은 당대의 히트곡인 위키리의 '저녁 한때의 목장 풍경'이다. 1면은 포 클로버스 멤버 4명이 부른 6곡이 포진이 되어 있고 2면은 '까만 눈동자의 그 아가씨' 등 봉봉사중창단의 노래 6곡이 수록되어 있다.

냇 킹 콜의 목소리를 흉내 낸 허스키한 창법이 돋보였던 최희준은 '그리운 별아', '향수' 2곡을 불렀고 보비 다린을 빼다놓은 창법으로 대중에게 어필한 위키리(본명 이한필)는 타이틀 곡 외에 '종이배' 한 곡을 더 불렀다.

그의 데뷔곡인 '종이배'는 독특한 음색으로 인기를 끌었지만 팝송 'Love me foever'의 표절로 1967년 방송금지곡이 되었다. 멤버 중 쇼맨십이 남달랐던 그의 활동 범위는 광범위했다.

60년대 중반부터 동아방송 라디오 '달려라 위키리'의 DJ는 물론 1966년 '밤하늘의 브루스', 1968년 '폭풍의 사나이'등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한 영화배우로도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요절가수 배호와도 절친했던 그는 1976년 동양TV '쇼쇼쇼'의 사회자와 KBS 전국노래자랑 초대사회자로 명성을 날렸다.

한국의 프랭크 시나트라를 자처했던 혼열가수 유주용은 '그대 오시지 않네' 한 곡을 불렀다. 그는 어버이날 주제가격으로 지금도 불리어지는 1968년에 소월 시에 곡을 붙인 '부모'의 오리지널 가수다. 달변의 진행능력으로 사회자로도 유명했던 그는 미니스커트 열풍을 몰고 온 가수 윤복희의 첫 남편이기도 하다.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까지 우아한 외모와 노래로 인기가 높았던 여가수 모니카 유(본명 유인경)는 그의 둘째 누나다. 윤복희, 모니카 유는 포 클로버스 멤버들과 어울리며 함께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는 최희준과 마찬가지로 서울대 문리대 재학시절 교내 장기자랑대회에서 노래로 1등을 차지하면서 민들레악단에 입단해 미8군 쇼 무대에 진출했다. 1961년 12월 KBS TV가 개국을 하면서 그는 사회자겸 가수로 활동하며 예명을 유주용으로 정했다.

페리 코모를 닮은 미성이 압권이었던 박형준은 '나 홀로 있어도'를 불렀다. '첫 사랑의 언덕'으로 옛 가요팬들에게 익숙한 그에게는 재미난 일화가 하나 있다.

1964년 어느 날 미군장교클럽인 국제호텔 나이트클럽(현재 KAL빌딩)에서 냇 킹 콜의 '고엽'을 노래했다. 헌데 내한공연 때문에 방한했던 진짜 냇 킹 콜이 '자신의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클럽으로 들어왔다. 이에 박형준은 당황한 나머지 노래를 중단하고 집으로 줄행랑을 쳐버렸다는 웃지 못 할 사연을 남겼다.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