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보이'와 앙소르눈은 울고 입은 웃는 슬퍼하는 남자 폭력의 뫼비우스 띠

미술은 언어다. 하지만 너무나 개인적이고 독창적인 까닭에 우리는 그들의 언어의 독해에 어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미술작품이 지닌 뜻을 헤아리고 그 작품을 통해 영화를 이끌어 가는 계기로 삼거나 영화의 반전을 암시하는 장치로 사용해 왔다. 이렇게 영화 속의 미술은 영화의 또다른 은유나 비유로 활용되면서 영화의 완성도를 높여 왔다. 영화 속의 미술이야기를 통해 영화와 미술의 통섭의 세계를 만났으면 한다.

'슬퍼하는 남자'(1892) / 올드보이

15년 동안 영문을 모른 채 단칸방에 갇혀있다 탈출에 성공할 즈음 자신이 납치된 곳에서 다시 풀려난다. 그래서 맥이 빠진 주인공 오대수는 어렵게 자신을 납치해서 감금한 사람을 찾아내지만 그의 엉뚱한 제안에 넘어가 5일 안에 자신이 납치된 이유를 알아내야만 하는 긴박한 상황에 빠진다. 영화 '올드보이'(Oldboy, 2003년작)는 어찌 보면 단순한 구조를 갖고 있지만 한국영화의 자존심을 세워준 영화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박찬욱이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는 국내에서만 총 326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한편 그에게 2004년 칸느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유 없이, 애매모호하게 정곡을 찌르고, 인간의 이면에 감추어진 자극적인 폭력성에 치를 떠는척하지만 사실은 스스로가 매우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채면서 놀라게 되는 영화가 바로 올드보이이다.

원래 1997년 나온 일본의 만화에서 아이디어를 따왔지만 사실은 만화에서 폭력배가 운영하는 사설 감옥에 갇힌 고토가 초등학교 동창으로 부동산 재벌로 성장한 가키누마의 음모를 10년 만에 알아내고 서서히 그에게 복수를 위해 다가간다는 기본설정만 빌려왔을 뿐이다. 영화는 만화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결말을 끌어내 커다란 반향을 불렀다. 여기에 1500만원을 지불하고 판권을 사와서 만든 이 영화를 일본에 220만달러를 받고 역수출해 한국민들의 일본에 대한 감정적 복수를 도와주기도 했다.

'복수는 나의 것', '친절한 금자씨'와 함께 박찬욱표 복수시리즈의 중간편이기도 한 이 영화는 최민식의 광적인 연기와 유지태의 차가운 연기가 묘한 대비를 일으키며 영화의 재미를 더한다. 15년의 감금과 탈출 직전의 석방 그리고 자신을 납치한 사람을 찾기 위한 5일간의 추적과 그 대결의 끝은 결국 모두가 죽는 삭막한 복수극의 종말로 이어진다.

이유도 모른 채 15년 동안 갇혀 사는 오대수의 방에는 그림 한 점이 걸려있다. 바로 벨기에의 화가 제임스 앙소르 (James Ensor, 1860 ~ 1949)의 '슬퍼하는 남자'(Man of Sorrow, 1891,Oil on canvas, 16 × 21.9 cm, Koninklijk Museum voor Schone Kunsten, Antwerp (KMSKA) 소장)이다.

마치 오대수의 헤어스타일의 원조처럼 느껴지는 이 작품의 주제가 되는 슬퍼하는 사람은 원래 성경의 이시야서 53장에 나오는 이야기이자 예수가 가시면류관을 쓴 채 승천하기 직전의 모습을 담고 있는 전형적인 도상이다. 그것을 앙소르는 눈은 울고 있지만 입은 웃고 있는 괴이한 모습으로 그려놓고 있다. 마치 선과 악 또는 고통과 희열이 동시에 공존하는 묘한 상황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그림 밑에는 19세기 미국의 여성시인 엘라 윌콕스(Ella Wheeler Wilcox, 1850-1919)가 쓴 '고독'의 한 구절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가 적혀 있다. 영화가 상영되는 중간 중간에 전체 줄거리를 암시하는 그림과 글은 오대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이우진(유지태분)이 영화 속 어딘가에 숨어있다 튀어나올 것처럼 늘 그곳을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 사내가 생각 없이 입을 놀린 나머지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다시 그 죄값을 치르기 위해 어마어마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혀를 잘라야 했던 이 영화에서 처음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에 세 번 되풀이되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에 앙소르의 섬짓한 또는 징그러운 그림 한 점은 오대수의 심정을 대변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복수가 복수를 낳는 그리고 결국 복수를 마치자 자신의 존재 가치를 상실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모습을 통해 복수의 고리가 단절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세상살이에 그들만의 복수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박찬욱은 다시 '친절한 금자씨'를 만들게 된 것은 아닐까.

최민식, 유지태와 함께 영화를 이끌어 가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앙소르의 그림은 현재 루벤스의 주된 활동무대이자 만화영화 '플란더스의 개'의 무대가 되었던 안트워프 왕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이상한 가면'(1892)
2-'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1889)
3-'가면이 있는 자화상'(1899)
4-'The Rower'(1886)


벨기에 출신의 화가 제임스 앙소르는 소름끼치고 엽기적인 장면을 주로 그린 화가로 해골과 유령, 무시무시한 가면 등 기이한 환상과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통해 세기말의 퇴폐적이고 염세적인 상황을 그대로 그림에 옮겨 낸 작가이다. 특히 1889년에 그린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Christ's Entry into Brussels, 1889, 유화, 252X431cm, 게티미술관, LA 소장)은 파격적인 표현으로 인해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전시조차 될 수 없어 제작된 지 40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공개될 수 있었다.

성경에는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시민들이 뛰쳐나와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하며 그를 환영하였다. 하지만 앙소르의 작품에서는 예수가 나귀를 타고 브뤼셀에 들어오는데 어느 누구도 쳐다보지조차 않는다. 게다가 사람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자신을 감춘 채 예수를 외면한다. 환영받지 못하는 예수는 성경에서처럼 당나귀를 타고 후광이 빛나지만 그림 중앙 상단에 조그맣게 그려져 당당한 구세주라기보다 초라한 패잔병처럼 보인다.

앙소르는 종교적 주제를 통해 근대사회가 갖는 본질적인 병폐를 고발한다. 산업혁명 이후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주도되는 사회의 물질적 풍요뿐 아니라 실증주의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라고 자처하는 근대주의가 종교적인 믿음과 신앙심보다는 현실과 현대의 안온함과 부유함 그리고 향락과 쾌락과 물질을 탐닉했다는 것을.

벨기에의 해변마을 오스텐스에서 살았던 앙소르는 표현주의라는 용어가 생기기 전부터 표현주의적 작품을 그린 선구적 화가로 특유의 어두운 도상과 가면 쓴 사람들을 통해 타락한 인간의 모습과 그들의 삶에 대한 공포를 철학적으로 나타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운영했던 가면가게의 추억은 그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익명성에 기대어 온갖 추악한 일들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인간의 욕망을 가리는 도구로 작품의 소재가 되어주었다.

앙소르는 벨기에의 화폐에도 등장할 만큼 널리 사랑받는 국민화가이지만 생전에는 언제나 대중은 물론 전문비평가조차 외면할 만큼 환영받지 못하는 화가였다. 그는 흔히 뭉크(Edvard Munch, 1863∼1944)와 함께 표현주의 화가의 선구로 꼽힌다. 그가 추구했던 표현주의는 반자연주의적인 경향의 화파를 의미한다.

더 이상 자연이나 대상을 묘사하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화가 스스로가 자신의 주관과 역량을 바탕으로 대상으로부터 받은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래의 그림이 외부의 대상들을 그리는 것이었다면 표현주의는 자신의 내면의 감정에 투영된 대상의 이미지나 느낌을 참신하고 대담한 수법을 통한 예술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말한다.



글 정준모(미술비평, 문화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