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명반·명곡] 부활 1집 Rock Will Never Die 1986년 서울음반기타리스트 김태원·보컬 이승철 콤비'희야', '비와 당신의 이야기'등 소녀팬 열광… 30만장 이례적 판매

1980년대의 대중음악은 확실히 활기가 넘쳤다. 젊은 세대를 대변했던 록은 70년대 중반 이후 된서리를 맞았다가 캠퍼스 밴드를 중심으로 부활을 기미를 보였다. 그리고 80년대 중반 한국 록은 사상 최대의 활황기를 맞이했다. 완벽한 부활을 넘어 역사에 기록될 페이지가 그때 수도 없이 아롱 새겨 졌다.

그때처럼 록이 주류음악으로 주목받았던 시기는 이 땅에서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0년대 서울 시민회관에서 젊은 영혼들을 뜨겁게 달궜던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의 열기를 뛰어넘는 완벽한 부활이었다. 아! 옛날이여.

당시 록의 열기는 확실히 기세등등했다. 70년대까지 TV 가요 프로그램에 가물에 콩 나듯 혹은 인기가수의 백밴드 정도로 등장했던 록밴드들의 위상이 확연하게 변모했다. 그때 말고 공중파 방송에 일상적으로 등장했던 록밴드의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이는 음악성과 대중적 인기가 동일시된 80년대만의 특이하고도 건강한 풍경이었다. 그렇지만 그 열기는 오래가질 못했다. 치명적인 덫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유효한 창작자보다 노래를 부르는 가수에만 집중되는 대중의 편향된 취향 말이다.

수순은 이렇다. 히트곡이 터져 인지도를 획득하면 어김없이 리드보컬은 솔로로 데뷔하고 밴드는 해체하거나 한동안 활동이 중단되는 공식 아닌 공식 말이다. 이는 다소 개선되지만 여전히 해결책이 절실한 우리 대중음악계의 영원한 숙제이기도 하다. '부활'도 이 공식에서 자유롭지 않은 밴드다.

부활에는 이승철이 있었고 백두산에는 유현상이 그리고 시나위에는 임재범이 있었다. 백두산, 시나위, 부활은 한국 록의 빛나는 시절인 80년대를 주도했던 삼두마차였다.

백두산의 김도균, 시나위의 신대철, 그리고 부활의 김태원은 그 시대에 가장 주목받았던 3대 기타리스트로 거론할 만하다. 김태원의 기타연주는 세련되고 진지한 스타일을 선보인 신중현의 혈통 신대철과 록과 국악의 접목을 통해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김도균과는 다른 색깔의 기타리스트다.

파워풀한 속주 경쟁에서는 다소 밀리는 듯 했지만 화려한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편곡과 톤 그리고 멜로디 창출부문에서는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했던 탁월한 창작가였다.

그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1986년에 첫 앨범을 들고 등장했다. 그중 부활의 1집 'Rock Will Never Die'는 록 음반으로서는 이례적으로 30만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당대의 열기를 증언하는 명반이다.

록밴드 부활의 전신은 록밴드 '디 엔드'다. 이미 언더그라운드의 스타밴드였던 '디 엔드'의 초대 리드보컬은 저 유명한 김종서다. 이승철이 영입되면서 밴드 이름은 '부활'로 개명되었고 한국 록의 부활에 기름을 부은 부싯돌이 되었다.

부활의 음악 중심은 리더 김태원이다. 탁월한 멜로디 창작에 탁월한 능력을 선보인 그는 당대의 중요한 송라이터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리드 보컬 이승철의 존재감은 리더인 김태원 보다 강력했다. 당대 소녀 팬들을 열광하게 했던 '부활' 인기의 원동력은 이승철이란 미소년 보컬의 걸출한 브랜드 파워에 기인했다.

총 9곡을 수록한 부활 1집에서 김태원의 창작곡은 '비와 당신의 이야기', '인형의 부활'등 4곡이다. 최대 히트곡은 양홍섭의 곡인 타이틀 '희야'다. '희야'는 비가 내리는 효과음을 도입한 애절한 도입부문과 이승철의 애절하고 흡인력이 대단했던 절창이 인상적인 80년대 최고의 싱글이다.

또한 '희야'와 더불어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이승철을 조용필에 필적하는 80년대 최고의 가수의 도약시킨 곡이다. 음악적으로 이 앨범의 백미는 '인형의 부활'에서 선보인 김태원의 절제된 연주와 변화무상한 사운드가 인상적인 '인형의 부활'이다.

더블 보컬 시스템으로 선보인 노래들에선 김태원의 묵직하고 거친 김태원의 보컬과는 달리 이승철의 미성은 파워풀한 이미지로 정형화된 로커로는 한계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당시 부활의 공연장에 가보면 그의 서정적이고 달콤한 노래에 열광한 소녀 팬들의 괴성으로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글=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