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알렌 감독의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욕망에 따라 사랑하는 자연스런 삶 추구, 문명화된 삶에 환멸 표현

우디 앨런(Woody Allen) 감독이 또 신작을 내놓았다. 앨런 감독은 1935년생이니까 우리나이로 치면 일흔 다섯 살이다. 1969년 <돈을 갖고 튀어라 >라는 코믹 영화로 데뷔한 이래 영화역사를 장식할만한 비중 있는 걸작들을 속속 내 놓으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감독이다.

창조적 열정이 식을 만도 한데, 꾸준하게 작품을 생산해내는 능력이 경탄스러울 따름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가 고희(古稀)를 훨씬 넘겼다고 해서 생의 말년을 관조하거나 회고하는 식의 성찰적 영화에 매달리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2000년대 들어 연출한 작품들의 면면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요컨대 그는 나이를 거꾸로 먹는지 성과 사랑에 대해서 점점 더 대담한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디 앨런의 거꾸로 가는 시간이랄까? 그가 <할리우드 엔딩>(2002년), <애니씽 엘스>(2003년), <매치 포인트>(2005년), <스쿠프>(2006년)에 이어 세상에 내놓은 최신작은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2008년)라는 작품이다. 국내 수입사의 단견으로 제목이 좀 허접하게 번역되었지만, 원제를 직역하면 <바로셀로나의 비키와 크리스티나 Vicky Cristina Barcelona>가 될 터이다.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바르셀로나에 두 달 간 휴가차 온 비키와 크리스티나가 겪는 모험적인 사랑이야기를 매우 코믹하면서도 신랄하게 다루고 있는 ‘변종적’ 로맨틱 코미디이다. 예술과 낭만의 도시 바르셀로나에 온 비키와 크리스티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선남선녀가 우연히 만나 티격태격하다가 마침내 행복한 결혼으로 귀결된다는 식의 장르적 로맨틱 코미디와는 양상을 달리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분명 ‘변종’이라 할만하다. 영화의 핵심 얼개는 번역된 제목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듯이 한 남자와 사귀게 된 한 여자가 그 남자의 전처까지 사랑하게 된다는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삼각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대학원 석사과정에 다니고 있는 비키(레베카 홀)는 사랑에 관한 한 사려 깊고 신중한 타입인 반면, 영화현장을 기웃거리고 있는 크리스티나(스칼렛 요한슨)는 한번 빠져들면 겉잡을 수없는 타입이다. 이 단짝 친구가 어느 날 스페인의 유명화가인 안토니오(하비에르 바르뎀)의 유혹에 빠져들면서 묘한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아니, 여자가 또 한 명 있으니 사각관계라고 해야 할까? 안토니오의 전처 마리아(페넬로페 크루즈)가 여전히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네 사람의 얽히고설킨 관계이니 사각관계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그런 애정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그런 사례가 현실에서 있다고 해도 그 같은 관계는 영화의 내러티브상에서는 아무런 갈등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무용한 관계일 뿐이다.

요컨대 사랑을 다룬 영화에서 사각관계라는 것만큼 허망한 것도 없다는 말이다. 로맨틱 코미디이건 멜로드라마이건 간에 사랑의 갈등 구조를 극대화시키는 장치는 오로지 삼각관계뿐이기 때문이다.

대중관객의 통속성에 기반을 둔 멜로드라마 내지 로맨틱 코미디에서는 ‘트라이앵글 러브 스토리’는 필수적인 구도다. 이런 삼각관계야말로 비록 진부하고 상투적이긴 해도,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철두철미하게 검증된 지극히 대중적인 구도로 굳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구도에서는 모두가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필연적으로 한 사람은 이러한 삼각 구도에서 제거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사랑은 두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진다는 통념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런 구도에서 탈락한 사람은 자의식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황폐해지는 크나큰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사랑의 쟁탈전에서 승리한 한 쌍의 이성애적 커플만이 영원한 행복을 맛보는 그런 구도가 삼각관계인 탓이다.

장르의 법칙이 이러한데도 할리우드 한복판에서 영화제작을 하고 있는 우디 앨런은 그 유서 깊은 삼각관계의 틀을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아무런 내적 갈등구조도 담보하고 있지 않은 사각관계를 굳이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앨런 감독이 지향하고 있는 가치 전복적인 성격을 읽어낼 수 있다.

앨런은 우선무엇보다도 가부장적인 일부일처 이성애주의에 대해 강한 반감을 표명한다. 이는 앨런이 실제로 양녀(養女)로 들였던 순이와 훗날 부부의 연을 맺었다는 파격적인 사건에서도 이미 확인됐던 일이다. 말하자면 현실적 삶과 영화적 허구 사이의 간극 허물기랄까?

앨런의 영화에도 종종 아버지 캐릭터가 나오지만, 가부장의 역할을 담지하고 있는 전통적인 기능을 포기한지 이미 오래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에서 안토니오의 아버지가 바로 그런 경우다. 그는 스페인어만을 고집하는 시인이지만, 시집한권 출판한 적이 없다. 이유인 즉 사람들이 거짓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욕망에 따라 사랑하며 부대끼는 자연스런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인간관계만을 유지하려는 문명화된 삶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안토니오와 마리아가 바로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전형적인 인물들임은 물론이다. 그들은 사랑해서 결혼했고, 부부간 트러블 탓에 이혼을 했다. 하지만 그들한테 결혼과 이혼은 전적으로 법률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마치 친구처럼 이웃처럼 또는 애인처럼 왕래하며 살아가는 두 사람 사이에 크리스티나가 끼어들게 된 것 뿐이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그들의 관계가 삼각관계를 형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구도 자체가 그들에게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한다. 앨런 감독이 이 영화에서 모색하고 있는 것은 사랑의 무게를 가려 최종 선발된 커플에게 영원한 행복을 안기자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나 자연스럽게 사랑했다가 또 애정이 식으며 자유롭게 떠나가는 다각적인 인간관계(즉 사각관계)의 묘사를 통해서 전통적인 연애 관념에 일침을 놓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자유분방하면서도 천진난만한 여주인공을 맡은 스칼렛 요한슨은 어느덧 앨런 감독이 총애하는 스타 페르소나가 되었다. 최근 들어 가장 섹시한 스타가운데 하나로 자주 지명되는 그녀의 존재자체는 이 작품에서도 빛을 발한다.

전작인 <엘레지>라는 영화에서 노교수와 사랑에 빠지는 비련의 대학원생 역을 맡아 청순미를 과시했던 페넬로페 크루즈는 이번 작품에서 히스테리컬한 이혼녀의 실감연기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거머쥐었다.

역시 전작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연쇄살인범 역할로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하비에르 바르뎀은 이번 영화에서는 주색에 빠져 사는 삼류화가 역할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초호화 캐스팅 속에 펼쳐지는 심상치 않은 사랑 놀음이 무척이나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김시무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