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명반·명곡] 최백호 16집 '낭만에 대하여' 1994년 대영에이브이평범한 이 시대 아버지들의 감성을 대변김수현 드라마서 불린 후 인기 날개… 40대 가수 빅히트 이례적 기록

요즘 대중문화에서 ‘복고’는 확실히 중요 키워드다. 불투명한 현재나 미래보단 좋았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복고문화는 중장년층에게는 추억과 향수를 안겨주고 신세대에게는 그 자체로 새로운 문화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최백호의 대표곡 '낭만에 대하여'는 복고문화의 최대 명품으로 평가할 만하다. 이 노래는 2009년 5월호 월간 에스콰이어에 의해 ‘남자가 들어야 하는 가요 50곡’에 선정되었고 삼성경제연구소의 ‘2008 송년회 분위기를 휘어잡을 필살가’ 설문조사에서 나훈아의 ‘사랑’에 이어 남자들의 ‘잔잔한 마무리 곡’ 부문 2위에 선정되었다. 그가 뒤늦게 ‘낭만전도사’로 불리게 된 이유일 것이다.

평범하게 늙어간 이 시대 아버지들의 감성을 대변한 이 노래는 궂은 비 내리는 날 색소폰 연주를 들으며 도라지 위스키를 마시던 옛날식 다방으로 인도하는 블랙홀 역할을 한다. 오늘의 풍요를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중장년 세대들에게 이 노래는 삶의 위안과 더불어 청춘의 낭만까지 되살려주는 마력을 발휘한다.

이처럼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들을 ‘낭만’이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채색한 이 노래의 미덕은 소통이다. 온갖 사연이 만발했던 다방이라는 공간을 잊지 못하는 동시대의 사내들은 모두 ‘내 노래’라고 가슴을 쳤고 자녀 세대들은 그런 아버지 세대의 낭만을 간접 경험하는 기회를 제공받았다.

1976년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로 데뷔해 전성기를 구가한 ‘가을과 고독의 남자’ 최백호는 1980년대 이후 굴곡진 삶을 경험한 후 1990년대 초 다시 대중가요계로 복귀했다. 전성기를 벗어난 나이든 가수들의 신보를 들어보면 대부분 과거를 추억하는 정서로 가득하다.

멜로디보다 살아온 인생에 대한 메시지가 강한 노래다보니 40대를 넘긴 나이에 빅히트를 기록한 가수는 전례가 없다. 그런 점에서 45살의 나이에 지나간 청춘의 낭만을 애절한 허스키 보컬로 토해낸 최백호의 ‘낭만의 대해서’는 무척이나 이례적이다. 탱고리듬을 차용한 트롯 장르로 무장한 그의 노래는 폭넓은 대중적 수용가능성을 획득했다.

1994년에 발표되었지만 이 노래는 즉각적인 반응을 획득한 노래는 아니다. 발표 후 2년 동안 하루에 한 장도 채 팔리지 않았던 실패한 앨범이었다. IMF를 목전에 둔 1996년 어느 날. 갑자기 하루에 2000장 단위로 대량주문이 밀려들었다. 작가 김수현의 KBS드라마 '목욕탕집 사람들'에서 탤런트 장용이 ‘낭만의 대하여’를 부른 것이 폭풍의 핵이 되었다.

사연은 이렇다. 작가 김수현은 차를 타고 가다 이 노래를 우연하게 들었는데 귀에 감겨오는 멜로디와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라는 가사에 반했다고 한다. 그녀는 노래를 수소문 해 다음 날 극 대본에 추가했다. 실제로 김수현 작가가 공감한 그 대목은 많은 중년여성 팬들을 사로잡은 최백호가 조탁한 언어의 마술이 빛나는 대목이다.

‘실연의 달콤함’이라는 대목도 중년남성들이 절대 공감하는 대목이다. 그는 “사랑을 하기에 힘이 부치는 나이가 되어보면 실연의 추억마저도 어찌 달콤하지 않단 말인가?!”라고 되묻는다.

‘낭만에 대하여’는 최백호가 집에서 유리에 비친 아내의 음식 하는 모습을 보다가 우연히 만든 노래다. 그 상황과 노래는 직접적 연결고리는 없지만 그는 그때 옛날 다방과 즐겨들었던 '로우라'라는 색소폰 연주곡이 갑자기 떠올랐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낭만에 대하여’를 생각해보면 가수가 노래를 만나는 것은 뭔가 운명처럼 세팅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낭만에 대하여’가 그대 가슴을 쳤다면 이후 발표된 ‘어느 여배우에게’와 ‘청사포’까지 들어보길 바란다. 그래야 최백호표 낭만 트릴로지 완결편의 진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낭만에 대하여’가 수록된 최백호 16집은 이후 35만장이 넘게 팔려 나가면서 당시 공중파TV 저녁 뉴스에 ‘40대 가수 최백호 이색 돌풍’으로 보도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음반의 히트퍼레이드와는 달리 대중의 직접적인 뜨거운 반응은 오히려 세월이 지나면서 그 강도가 더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명곡만이 보유한 시대 초월적 연속성이 아니겠는가!



글=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