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제천과 제주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에피소드10편의 작품 재구성하면 하나의 대작 완성

홍상수 감독이 빠른 속도로 작품을 생산해내고 있다. 전작인 ‘밤과 낮’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단편 ‘첩첩산중 Lost in the Mountains’과 장편 ‘잘 알지도 못하면서 Like You Know It All’를 잇달아 내놓고 있는 것이다.

두 작품 다 지난 2008년부터 제작을 해서 전자인 단편은 제10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였고, 후자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5월 중순 본격 개봉을 하게 되었다.

장편으로만 친다면 아홉 번째 작품이다. 지난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라는 특이한 제목의 영화로 데뷔한 홍상수 감독은 지금까지 모두 열편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먼저 전문가시사회에 참석했던 동료 평론가 전찬일은 자신이 최고로 평가했던 데뷔작을 훨씬 능가하는 걸작이라며 흥분된 어조로 귀띔을 해주었다.

그와 달리 홍상수의 두 번째 작품인 ‘강원도의 힘’을 최고작으로 여기고 있던 본 평자로서는 야릇한 기대감을 갖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일반시사회장을 찾았다. 게다가 전주에서 이미 단편 ‘첩첩산중’을 무척 재미있게 보았던 터라 객석에 앉았을 때는 조바심이 나기까지 했다.

영화평론을 하는 사람치고 누군들 안 그러겠냐마는 나는 유달리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좋아해서 이미 그의 전작(全作)에 대한 장문의 작품론을 쓰기도 했고, 스스럼없이 홍상수 전문가임을 자처하기도 했다. 행여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홍상수 영화를 잘 안다고 떠벌리고 다녔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쨌든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영화의 제목은 무척이나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홍상수 감독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은 자기가 아는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고 연출의 변을 피력했다. 내가 홍상수 감독을 좋아하는 이유다. 그는 거창한 내러티브에 집착하거나 심오한 주제의식에 매달리지 않는다. 현란한 스펙터클에도 관심이 없다.

그저 그때그때 자신이 보고 겪은 얘기들을 엮어 스스럼없이 시나리오를 쓰고, 제작자가 나서면 그것을 영상으로 옮길 따름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일반적 의미에서 영화 같지가 않다. “영화는 영화다”라는 말이 적어도 홍상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에게는 영화가 곧 현실이 되고 현실이 곧 영화가 된다. 단순한 수사학이 아니고 실제로 그렇다. 누구나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이 영화의 무대는 크게 두 곳으로 나뉜다. 제천과 제주가 주요 무대다. 먼저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열리는 제천으로 가보자. 우선 무엇보다도 영화감독 구경남(김태우)이 상기 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이 무척이나 친근하게 다가온다. 화면 속에서 내가 일전에 가보았던 장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아무튼 구경남은 심사라는 본연의 임무는 뒷전인 채 이사람 저사람 만나 술판을 벌이기에 여념이 없다. 프로그래머 공현희 역을 맡은 엄지원의 다소 거만한 듯한 말투도 살갑게 다가온다. 오는 8월 제천영화제에 참석하게 되면 현역 프로그래머들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될 것 같다. 구경남과 함께 심사에 참여하고 있는 영화평론가의 존재도 비록 단역이지만 눈길을 끈다.

그가 감독한테 “저는 감독님 영화를 통해서 인간심리의 이해의 기준을 얻었습니다.”라고 인사말을 건넬 때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선 것 같은 쑥스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12일 후에 구경남 감독은 제주영상위원회의 초청으로 제주도 여행을 하게 된다. 영화전공 학생들한테 자신이 만든 작품을 틀어주고 질의응답을 하는 일종의 특강이었다. “왜 아무지 보지 않는 이런 난해한 영화를 만들었느냐”는 한 여학생의 날카로운 질문에 짐짓 예술가연 하면서 자신도 잘 모르는 언설로 둘러내는 구경남의 모습은 처연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결국 홍상수 감독이 영화 제목을 통해 한계를 그었듯이 사람들은 누구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을 하고, 나아가 그 이상을 말 하려고 하지 않던가?

어쨌든 구경남이 특강이후 회식자리까지 마치고 대선배의 집에 초대받아 그의 젊은 부인 고순(고현정)과 대면하면서 벌어지는 기막힌 에피소드가 이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데, 나는 이 대목이야말로 홍상수 감독이 진짜 하고 싶었던 얘기를 가장 적나라하게 펼쳐 보이고 있지 않나 싶었다. 그렇다고 모종의 심오한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은 아니다. 일상성 속의 진실이랄까?

혹자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이 소제나 제제(題材)가 모두 비슷하여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폄훼하기도 한다. 그가 만약 일반 관객이라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려니 할 수 있다. 허나 그가 혹여 전문가를 자처하는 평론가 혹은 영화관련 글쟁이라면 그는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감독 특유의 스타일마저 평자의 선입견에 따라서 재단(裁斷)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홍상수 감독은 어쩌면 장대한 인간희극(人間喜劇)을 찍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찍은 열편의 작품들을 가지고 재구성을 한다면 거의 완벽하게 아귀가 들어맞는 20시간짜리 장편 대작(magnum opus)이 탄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치 프랑스의 대문호 발자크가 문학의 영역에서 성취했던 것처럼 말이다.

발자크는 자신의 작품 대부분에 인간희극(La Comedie humaine)이라는 총체적인 제목을 붙여 사회사적 구상아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물론 이런 작업을 홍상수 자신에게 요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건 전문적인 관객, 나아가 평론가의 몫이고 나는 일개 평론가로서 이미 그런 작업의 일환으로 홍상수 감독의 작품세계를 들여다 본적이 있다.

나름대로 창조적인 독해인 셈이다. 일례만 들어보자. 이 영화에서 구경남과 고순은 대학 선후배 사이로 한때 연애를 했던 사이인데, 전작인 ‘해변의 여인’에서 이미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서 피어오른 뜨거운 열정이 전혀 뜬금없는 것이 아니라 오랜 숙성의 결실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다. 홍상수 영화들은 하나하나 따로 떼어놓고 보면 재미가 반감된다. 하나이면서 열처럼, 열이면서 하나처럼 보이는 게 홍상수 영화의 참 매력이 아닐까? 그는 딱 자기가 아는 만큼만 영화를 만들었다.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단언하건대 이전 홍상수 영화를 아는 만큼 지금 홍상수 영화의 묘미를 더 잘 만끽 할 수 있다.



김시무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