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홍현기 감독의 '물 좀 주소'돈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소시민의 일상적 삶을 그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 하지만, 그러나 낯선 영화 한편이 오랜 기다림 끝에 관객 앞에 선을 보였다. 홍현기 감독의 ‘물 좀 주소 Thirsty’는 2008년 초에 제작되었지만, 이제야 극장 개봉에 들어간 것이다.

국내외적으로 경제상황이 좋지 않을 때 바로 그 경제위기의 최전선에 놓인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늦깎이 개봉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아이러니컬하게 여겨진다.

‘물 좀 주소’는 이전보다 훨씬 더 첨예화된 금전만능 식 사고방식으로 찌든 현대 사회의 모순에 대해 날카롭게 꿰뚫어 보면서도 그 안에서 부대끼는 인간을 향한 따뜻한 애정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한 데뷔작이라 하겠다.

이창동 감독의 일련의 작품들에서 조연출을 맡았던 홍현기 감독의 ‘물 좀 주소’는 기획부터 제작을 거쳐 개봉에 이르기까지 무려 7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영화 제작 자체가 경제위기 극복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되었다고나 할까.

홍현기 감독은 이 작품으로 지난 2008년 6월 제11회 상하이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 뉴 탤런트 어워드(Asia New Talent Award) 경쟁부문 최우수감독상을 수상했다.

영화 ‘물 좀 주소’의 핵심화두는 돈이다. 인간의 삶을 한없이 윤택하고 편리하게 하면서도 자칫 비인간화로 몰아가기 십상인 돈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소시민들의 일상적 삶이 비교적 낮은 목소리로 펼쳐지는 것이다. 특히 제1금융권의 문턱이 턱없이 높아진 탓에 일반 서민들의 생계가 더욱 막막해진 상황에서 이 영화가 주는 풍자(諷刺)와 해학(諧謔)은 매우 시의적절하다고 하겠다.

부친이 경영하던 중소기업이 망하면서 어쩔 수 없이 제2금융권에 취직하여 재기를 꿈꾸는 구창식(이두일)은 그러나 그 자신 자동차 할부금 때문에 불법 사채업자들한테 쫓기는 신세다. 특이할 것 없는 평범한 외모 탓에 주로 보통사람들 역할만을 전문으로 해온 캐릭터 배우 이두일이 마치 준비된 적역을 맡은 듯 호연을 보여준다.

10대 때 가출하여 미혼모가 된 곽선주(류현경)는 앞뒤 가리지 않고 글어댄 카드빚 때문에 구창식으로부터 빚 독촉을 받는 신세로 전락한다. 한편 부도로 공장을 날리고 결혼을 앞둔 딸을 위해 간신히 집 한 채를 빼돌렸던 조을상(김익태) 사장도 역시 구창식의 추심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지방대학을 갓 졸업하고 수십 차례의 면접 끝에 제3금융권(즉 불법사채업)에 취직을 한 심수교(강인형)은 빚쟁이들을 가혹하게 다루라는 깡패 같은 사장의 압력 때문에 딜레마에 빠진다.

이처럼 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모두가 선남선녀들이지만, 그들이 일단 정글과도 같은 사회의 그물망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낯선 이방인이 된다. 아니 적대적으로 된다. 그것이 냉혹한 사회이고, 차가운 현실이다.

이러한 척박한 사회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물이다. 오랜 가뭄 끝에 속 시원하게 쏟아지는 한바탕 소나기 같은 물. 그 물을 달라고 이 영화는 호소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배우는 단연 류현경이다. 1999년에 제작된 ‘태양은 없다’, ‘마요네즈’ 등에서 아역배우로 일찌감치 가능성을 인정받은 그녀는 드라마에도 출연하여 비록 작은 역할이지만 탄탄한 연기력을 과시했다. 그러다 그녀의 존재감을 알린 결정적인 작품에 출연하게 된다.

지난 2008년 사극영화(costume film) 분야의 새 영역을 개척했던 김유진 감독의 ‘신기전’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 주연은 설주 역의 정재영과 홍리 역의 한은정이다. 내가 특히 주목했던 부분은 조연급 연기자들이었다.

이 영화에는 두 종류의 사랑이 등장하는데, 의리로 뭉친 마초의 전형인 설주와 도도하고 당찬 규수인 홍리가 처음에는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사랑에 이른다는 설정의 로맨틱 코미디가 그 첫째요, 여성전사 방옥(류현경)과 그녀의 낭군 인하(도이성)의 멜로적 사랑이 그 두 번째다. 방옥과 인하 두 사람은 천생연분의 짝으로 백년가약(百年佳約)을 꿈꾸었지만, 작전수행중 인하가 살신성인의 길을 택함으로써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는 서글픈 사랑으로 남는다.

가장 숙연한 대목이기도 했다. 결국 방옥은 낭군을 잃은 슬픔을 뒤로하고 심기일전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견인차가 된다. 영화의 전체 맥락상 류현경이 맡은 역할은 그리 큰 것은 아니었으나, 결정적인 대목에서 그녀가 보여준 외유내강(外柔內剛)의 당찬 모습은 강한 인상을 남겨주기에 충분했다. 류현경의 재발견이랄까?

이미 아역배우로 가능성을 인정받았다고는 해도 범작인 ‘동해물과 백두산이’(2003) 등에서 그녀가 맡은 역할과 ‘신기전’에서의 역할 사이에는 모종의 갭이 있었다. 만약 그 중간에 ‘물 좀 주소’라는 작품이 없었더라면, 나는 그녀가 보여준 연기력의 도약을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요컨대 이 영화에서 그녀가 맡은 곽선주라는 캐릭터가 있었기에 대작 ‘신기전’에서의 방옥이 가능했었다는 얘기다. 말하자면 류현경은 주류 상업영화(mainstream commercial film)의 조연급 연기자로 재진입하는 과정에서 독립제작 영화(independent production film)에서 주연을 맡아 혹독한 훈련의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이너리그에서 절치부심했던 야구선수가 마침내 메이저리그에 와서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격이다.

류현경이 맡은 곽선주라는 캐릭터는 대단히 복합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말로는 있는 집 딸인데 무작정 가출했다고 시니컬하게 우기지만, 애당초 가족 같은 것은 없는 외톨이였다. 그녀는 낮에는 나레이터 모델로 활약하며 누구보다도 발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진짜 그녀의 소망은 로커가 되어 무대에 서보는 것이다.

그녀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명랑소녀로 비치지만, 정작 속내는 깊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그녀는 자신을 아껴주는 남자들을 이용하고 게다가 속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미혼모로 만들고 매몰차게 팽개친 사회에 대한 불신의 표현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하여 영화의 라스트신에서 그녀가 힘차게 목청 높여 부르는 ‘물 좀 주소’라는 주제곡은 팍팍해지고 메마른 가슴을 적셔주는 청량음료 같은 맛을 선사한다. 음악과 춤에 남다른 재능을 겸비하고 있는 류현경이 이 작품에 와서야 비로소 자신의 끼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김시무 영화평론가